간첩죄 누명쓴 행동파 文人들
  • 金東銑 기자 ()
  • 승인 1989.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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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文人⋅知識人 間諜團사건’ 소설가 李浩哲씨

1974년 1월7일 아침 9시가 조금 지나면서 명동YWCA 골목에 있는 코스모폴리탄 다방에서는 평상시에 볼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출근시간이 지난 뒤라 일반손님이 거의 없어 한산한 가운데 차 나르는 아가씨들이 쉬고 있을 때 소설가 李浩哲, 朴泰洵, 송영, 黃晳暎 등이 들어와 자리를 잡은 뒤, 곧바로 金芝河 등의 또다른 문인들이 속속 나타나 그들과 합류했다. 그리고 문인들 외에도 취재기자들이 몰려들어 다방 안은 삽시간에 붐비기 시작했다.
 9시30분 경에는 당시 원로 소설가였단 安壽吉(작고)이 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와 있던 문인들이 모두 일어서서 반색을 하며 인사를 했고, 이어 누군가가 “그럼 시작하지”라고 말하자 문인들과 기자들에게 유인물이 돌려졌다. 이 때부터 문인들의 표정은 어떤 ‘결연한 의지’ 때문에 굳어졌고, 이호철이 일어서서 <개헌지지 문인성명>이라는 성명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이호철이 성명서를 읽기 시작하자 카메라 후래쉬가 요란스럽게 터졌는데, 그러나 곧바로 정복경찰과 사복형사들이 다방 안으로 들이닥쳐 성명서 낭독은 중단 됐다. 경찰은 그들 문인 20여명을 다방 밖으로 끌고 나가 명동성당앞에 대기하고 있던 2대의 경찰차에 그들 중 9명만 ‘무작위’로 태웠다.
 이 때 연행된 문인들은 이호철, 박태순, 송영, 김지하 등이었는데, 그들은 경찰서에서 성명서 작성경위 등에 대해서만 간단한 조사를 받고 오후 6시경에 훈방됐다. 훈방된 문인들 중김지하, 송영, 황석영 등은 이호철 집에 함께 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박정희정권을 성토하기도 했고, 술에 취하자 김지하와 송영은 노래시합을 하다가 새벽에야 모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조반을 먹다가 라디오뉴스로 유신헌법개정 1백만명 서명운동을 주도하던 張俊河가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김지하 등은 이 뉴스를 듣자마자 식사를 중단하고 이호철 집을 빠져나갔다. 형사 7명이 이호철 집에 들이닥친 것은 그들 3명이 대문을 빠져나간 직후였다. 형사들은 상부의 지시라며 이호철은 연금시켰다. 그리고 이날 오후 5시에는 ‘개헌언동’을 금지하는 대통령긴급조치 1, 2호가 발동됐다.
 이호철이 연금당한 것은 1월14일까지였는데, 이날 아침 보안사에서 2명이 찾아와 “윗사람이 잠시 뵙잡니다”라며 그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했다.
 이호철의 이름이 신문에 대서특필된 것은 그로부터 20여일이 지난 2월5일 석간부터였다. 신문기사 제목은 ‘文人⋅知識人 간첩단 적발’이었고, 이 ‘간첩단’에는 그를 비롯해 任軒永(평론), 金宇鍾(평론), 鄭乙炳(소설), 張伯逸(평론) 등 4명의 문인이 포함돼 있었다.
 검찰이 발표한 이호철의 협의사실은 그가 72년 11월 일본에서 개최된 펜클럽회의 때 渡日, ‘북한의 在日 공작지도원’ 金基深과 7회에 걸쳐 접촉하면서 6회의 향연과 공작금 50만원, 모교인 元山중학교 졸업성적표와 당시 사진 등을 받고 간첩으로 포섭되어 ‘문인을 동원, 현정권의 부조리를 소재로 한 작품활동으로 대중을 선동하라’는 지령을 받고 귀국하여 반정부투쟁을 선동하는 작품활동과 개헌서명 발기인으로 활동하면서 개헌지지문인 시국성명에 주동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인간첩단’ 발표문에는 여느 간첩사건 발표 때처럼 증거품으로 카메라 1대, 라디오 1대, 녹음기 1대 등을 압수했다고 써 있었다.
 이 사건은 발표 당시에 ‘조작극’이라는 인상을 물씬 풍겼는데, 재판과정을 보면 그것이 더욱 명백해진다. 1심선고는 그 해 6월28일에 있었는데, 정을병은 무죄로, 임헌영, 김우종은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이호철에게는 징역 1년6개월(구형7년)이 선고됐다. 그러나 10월2일에 선고된 2심에서는 그와 함께 장백일도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다음은 이호철의 회고담.
 “73년말에는 시국이 온통 뒤숭숭했지요. 서울대생들의 유신반대데모 이후 전국 대학생들이 유신에 항거했고 언론계와 지식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우리 문인들도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고 있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개헌청원운동에 참여했는데, 그들은 아마도 문인들의 단체행동을 두려워했던지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웠어요. 김기심씨는 고향 4년 선배인데. 펜클럽회의 때 만나 술도 같이 마셨고 ‘민주활동 열심히 하라’는 격려와 함께 용돈도 10만원 받았어요. 그 돈은 선배가 후배에게 주는 용돈이라고 생각했지요. 검찰조사 때 검사에게 ‘시시한 짓 집어치우고 막거리나 마시러 나가자’고 했더니 겸연쩍게 웃습디다.”
 문제의 ≪한양≫지에는 그뿐만 아니라 친정부 문인들이었던 김동리, 모윤숙, 조연현 등도 기고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한국문단에 매우 중대한 분수령을 만들었다. 스스로 허무주의자로 자처했던 高銀이 이호철 구명운동 진정서에 문인들의 서명을 받은 일에 앞장서면서 ‘현실참여’움인드로 변신했고, 그해 11월17일에 결성된 자유실천문인협회의(이하 ‘자실’)대표간사로 뽑히면서 문단의 반독재투쟁 선봉장이 되었다.
 ‘자실’ 소속 문인들은 75년 문협 이사장선거에 이호철을 추천, 조연현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함으로써 이호철의 ‘간첩 누명’을 사실상 벗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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