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광고전에 ‘판 튀는’ 애국가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6.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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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꾼들 “붉은악마가 KTF 대신해 SK텔레콤과 대리전” 의혹 제기

 
애국가 논란으로 사이버 세상이 시끄럽다. 윤도현 밴드가 부른 애국가 응원가 때문이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위해 윤도현 밴드는 애국가를 록으로 편곡해 응원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SK텔레콤이 광고를 통해 이를 선보였다. 이에 대해 뜨거운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논쟁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애국가를 어떻게 응원가로 쓰느냐, 애국가를 어떻게 록으로 편곡할 수 있느냐, 애국가를 어떻게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쟁에 대해서 많은 누리꾼(네티즌)들은 의아해하고 있다. 애국가를 응원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미디어다음의 누리꾼 투표 결과, 찬성(73%)이 반대(27%)보다 월등히 많았다. 태극기를 핫팬츠와 탱크톱으로 만들어 입으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국기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 월드컵 세대에게 애국가의 변신은 그리 낯설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애국가 응원가 관련 논란은 사실 억지스런 부분이 없지 않다. 애국가 자체가 맨 처음에는 응원가로 불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 애국가가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 리듬에 맞춰 불리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안익태 선생은 애국가를 새로 작곡해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과 함께 불렀다. 애국가의 출발은 응원가였던 셈이다.

애국가 논란의 진원지는 붉은악마 응원단

애국가를 록으로 편곡해 부른 것도 그다지 새로운 일은 아니다. 록밴드 8·15, 펑크록 밴드 노브레인 등이 애국가를 록으로 편곡해 부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가수 DJ DOC는 댄스곡 버전으로, 가수 이은미는 재즈 버전으로, 가수 박화요비는 R&B(리듬 앤드 블루스) 버전으로 각각 편곡해서 애국가를 부른 적이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등 유명 팝가수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국 국가를 편곡해 부른 적이 있다.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씨는 “애국가 논쟁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음악을 해석하는 자유가 없다면 음악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애국가의 신성성을 훼손했다는 주장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애국가 논란 중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은 마케팅을 위해 상업적으로 애국가를 활용했다는 비판론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이미 애국가는 오스람전구와 교보생명 같은 회사의 광고에 여러 차례 등장했다. 윤도현밴드가 속한 다음기획의 탁현민 콘텐츠팀장은 “가수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애국가가 특정 기업 광고에 쓰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광고에 쓰인 애국가로 돈벌이를 했느냐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윤도현밴드는 이에 부합하도록 음원을 무료화했고 가창료도 받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애국가 논란의 진원지는 바로 붉은악마 응원단이다. 애국가를 응원가로 쓰고, 록으로 편곡하고,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비난은 대부분 붉은악마에게서 발원했다. 붉은악마는 윤도현밴드가 록으로 편곡한 애국가가 응원가로서 부적절하다며 조목조목 반박하기도 했다. 파문은 안익태재단이 윤도현밴드에게 유감을 표하면서 더욱 커졌다. 유족이 애국가의 저작권을 이미 국가에 헌납했기 때문에 사용에 문제는 없지만 안익태재단의 반대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4년 만에 환상의 콤비에서 ‘라이벌’로

붉은악마가 윤도현밴드의 애국가 응원가를 비난한 것에 대해, 업계 관계자들은 윤도현밴드를 모델로 기용한 SK텔레콤을 겨냥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을 통해 막대한 홍보 효과를 보았던 SK텔레콤은 한국 축구에 대한 계속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SK텔레콤은 여기에 소홀했다. 붉은악마는 그동안 SK텔레콤이 너무 월드컵의 과실만 따먹으려 한다고 비난해 왔다.  특히 붉은악마는 SK텔레콤과 SK그룹사들이 붉은악마와 협의 없이 광고에 이미지를 계속 사용한 것에 대해 반발해왔다.

부천 SK의 연고지를 제주도로 이전한다는 것도 SK그룹에 대한 붉은악마의 반발을 부채질했다. 부천 SK는 붉은악마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팀이다. 붉은악마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부천 SK 서포터스인 헤르메스 출신들이 있다. 국민 응원가로 부상한 <오 필승 코리아>도 <오 필승 부천 SK>를 바꿔 부른 것이었다. 부천SK의 연고지 이전에 반발해 붉은악마는 3월1일 열리는 앙골라와의 평가전에서 이전 반대 시위를 벌일 작정이다.

그러나 SK텔레콤을 비난하기 위해 SK텔레콤 광고에 출연한 윤도현밴드를 비난한 붉은악마 역시 역풍에 시달리고 있다. 올해 월드컵에서 붉은악마를 후원하고 있는 곳이 바로 SK텔레콤의 경쟁사인 KTF이기 때문이다. 누리꾼들은 붉은악마가 KTF를 대신해 SK텔레콤과 대리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붉은악마와 SK텔레콤, 그리고 윤도현밴드의 지금의 이런 대립은 2002년과 비교해보면 무척 낯선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붉은악마와, 붉은악마가 문제를 제기하는 대상인 윤도현밴드, 그리고 붉은악마의 궁극적인 표적이자 윤도현밴드를 후원하고 있는 SK텔레콤은 당시 환상의 콤비를 이루던 삼각 트리오였다. SK텔레콤은 붉은악마를 후원했고, 붉은악마는 윤도현밴드에게 <오 필승 코리아> 등 응원곡을 부르게 했다.

붉은악마·SK텔레콤·윤도현밴드의 삼각 트리오는 월드컵의 최대 수혜주였다. 사람들은 SK텔레콤의 슬로건이었던 ‘Be the Reds’가 새겨진 빨간 티셔츠를 입었고, 붉은악마는 월드컵의 또 다른 주역, 12번째 선수로 인정받았으며, 윤도현밴드는 국민 밴드로 부상했다. 모두가 승자였다.

월드컵 응원, 두 패로 나뉘어 진행될 수도

그러나 4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변수는 SK텔레콤의 경쟁사인 KTF였다. KTF가 붉은악마의 공식 후원사로 나서면서 이 파트너십에 균열이 생겼다. 2002년 월드컵 당시 KTF는 삼각 트리오의 최대 피해자였다. 월드컵 공식 후원사로서 막대한 후원금을 내고도 홍보 효과를 고스란히 SK텔레콤에 내주었기 때문이다. ‘Korea Team Fighting’이 ‘Be the Reds’에 묻힌 것은 KTF에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KTF와 붉은악마는 SK텔레콤을 견제했다. SK텔레콤 CF에서 윤도현밴드가 <오 필승 코리아>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주지 않은 것이다. CF 배경음악으로 <오 필승 코리아>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SK텔레콤은 대안을 모색해야 했다. 윤도현밴드는 응원가로 준비한 록 버전 애국가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렇게 해서 애국가 응원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번 애국가 논란을 KTF와 SK텔레콤의 월드컵 마케팅 전쟁의 전초전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 공연 기획자는 “이번 논란은 KTF와 SK텔레콤이 벌이는 샅바 싸움이다. KTF와 붉은악마는 3월5일에 대대적인 응원가 발표회를 가질 예정이었다. 이들은 애국가 응원가로 선제 공격에 나선 SK텔레콤과 윤도현밴드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KTF와 SK텔레콤의 월드컵 마케팅 싸움은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조짐이다. 붉은악마와 함께 ‘국민 여동생’ 문근영을 전면에 내세운 KTF는 새로운 응원가를 발표하고 월드컵 응원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다. SK텔레콤 역시 윤도현밴드의 애국가 응원가를 바탕으로 박지성·이영표 선수를 동원해 월드컵 마케팅의 주도권 경쟁을 벌일 예정이다.    

그러나 두 통신 회사가 정면으로 맞섬으로써 월드컵 응원도 패가 갈려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KTF와 붉은악마가 주최하는 행사에는 윤도현밴드가 빠지고, SK텔레콤이 주관한 행사에는 붉은악마가 배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붉은악마 관계자는 윤도현밴드의 애국가 응원가는 사용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혀왔다. 벌써부터 양 진영간의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다. 각축전이 가장 치열한 곳은 월드컵 응원의 주 무대가 될 시청 앞 광장이다. 누가 이 공간을 선점할지를 놓고 불꽃 튀는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윤도현밴드측은 매우 난감해하고 있다. 특히 KTF가 윤도현밴드의 대항마로 내세우고 있는 그룹 버즈는 윤도현밴드가 전국 콘서트 때 오프닝 무대에 세워 데뷔시켜서 동생처럼 생각하는 밴드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 평론가 강명석씨는 “월드컵은 국민의 잔치 같은 중요한 행사다.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는데 기업들의 상혼 때문에 벌써부터 판이 깨지고 있다. 응원을 자본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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