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의 차이가 ‘갈등’을 부른다
  • 표정훈(출판 평론가) ()
  • 승인 2006.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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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책] <비전의 충돌:세계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세상의 갈등,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으로 정리

 
영어 단어 가운데 비전(vision)만큼 그럴 듯하게 다가오는 단어도 드물다. 선견지명·상상력·관찰력·통찰력·미래상·직감력·시야 등, 그 뜻도 다분히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이다. 그래서인지 ‘비전’이라고 소리 내어 발음하는 순간 (적어도 필자는) 뭔가 뭉클하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비전이 있어야 잘 된다고들 한다. 지도자의 리더십에서도 비전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비전이 꼭 그렇게 뭉클하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하나의 비전을 강요받는 상황, 상반되는 입장의 두세 가지 비전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상황도 나타난다. 이 경우 비전은 세계관이나 인간관을 뜻하는 말에 가깝다.

이 책은 제목과 부제목이 말해주듯이, 작금의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갈등의 밑바탕에 비전의 차이, 요컨대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의 차이가 깔려 있다는 것은 주장한다. 저자 토머스 소웰 교수(미국 스탠퍼드대)에 따르면 그런 차이의 구도, 충돌의 양상은 여러 세기가 지나는 동안 놀라울 정도로 변하지 않았다. 그 변하지 않는 틀을 그는 제약적 비전(Constrained Vision)과 무제약적 비전((Unconstrained Vision)으로 정리한다.

먼저 제약적 비전은 <도덕 감정에 관한 이론>(1759년)을 쓴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데, 인간의 본성은 어디까지나 이기적이어서 자기 이익부터 챙기려 한다. 더구나 이런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이런 한계를 놓고 실망하거나 바꾸려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는 데 있다. 다만 법과 관습의 한도 안에서 각자가 자기 이익을 위해 노력하다보면(이게 바로 시장이다) 사회적 이익이 발생한다고 본다. 이러한 제약적 비전에 따른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은 일종의 자연스런 균형 상태나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정치적 정의에 관한 고찰>(1793)을 쓴 윌리엄 고드윈으로 대표되는 무제약적 비전이다. 무제약적 비전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완벽해질 때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너그러우며, 인간의 지적 능력의 가능성도 무한하다. 인간이 이성적으로 행동하기만 한다면 인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수 있다.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인간은 공공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다. 시장의 균형이 아니라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전체적인 번영과 자유를 희생하지 않고서도 평등을 이룩할 수 있다. 

충돌 양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

시장 자유적 균형을 강조하는 제약적 비전과 직접 개입적 평등에 주안점을 두는 무제약적 비전. 이렇게 놓고 보면 제약적 비전이 보수, 우파, 한나라당, 그리고 이른바 뉴라이트에 해당하고 무제약적 비전이 진보, 좌파, 민주노동당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 소웰은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을 일반적인 우·좌파 구분과는 다른 것으로 설정한다. 이를테면 칼 마르크스만 해도 과거와 현재는 제약적 비전으로 바라보고, 미래의 유토피아인 공산 사회에는 무제약적 비전을 통해 접근한다. 더구나 제약적 비전이든 무제약적 비전이든 공공의 이익을 중시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서로 무엇이 어떻게 다르고 무엇을 공유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합의할 수 있는 지, 비전끼리의 대화와 상호 이해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아래와 같이 충고하고 있지만, 우리 현실을 돌이켜보면 새삼 우울해진다. 비전의 충돌은 정략(政略)의 난투보다는 그래도 수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일관된 비전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노선의 차이만 무성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우리 모두는 비전을 갖고 있다. 비전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소리 없이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비전은 도덕, 정치, 경제 혹은 종교적인 것일 수도 있다.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는 우리의 비전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때로 필요하다면 비전을 저버리기보다는 파멸을 감수한다. 비전이 조화될 수 없을 지경으로 충돌할 때 사회는 분열된다. 이해관계의 갈등은 단기에만 영향을 미치지만 비전의 충돌은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  

덧붙이자면 책이든 뭐든 분류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이 책을 ‘종교, 신화/정신세계, 신비주의’로 분류해 놓은 한국 최대 포털 사이트의 책 정보 코너는 실소를 자아낸다. 아마 제목의 비전을 종교적 혹은 신비적 비전(秘傳)으로 본 모양이다. ‘비밀로 하여 특정한 사람에게만 전수되는 것’으로서의 비전의 충돌이라면 무협으로 분류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어느 서점이 소설가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을 낚시 실용서로 분류해 놓았다던 전설이 새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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