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모순투성이 미신”
  • 이문재(시인) ()
  • 승인 2006.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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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책] <삶은 기적이다>/물질주의 가득찬 현대 과학 통박

 
그렇다. 문제는 언어, 언어다. 과학과 예술(인문학)이, 스노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두 개의 문화’여서 서로 대화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니, 다른 정도를 넘어선다. 과학과 예술은 상대방에게 ‘그것은 언어가 아니다’라고 손가락질한다. 두 문화는 배타적인 언어로 과학과 예술, 인간과 자연, 현재와 미래를 정의한다.

미국의 저명한 시인·소설가이고, 문명 비평가이자 농부인 웬델 베리(1934~ )가 내놓은 <삶은 기적이다>는 본격적인 서평인 동시에, 과학·기술 패권주의에 대한 진지한 대안이다. 베리가 두 눈에 불을 켜고 읽은 책은 세계적인 사회(진화)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하버드 대학 생물학과 교수)의 <통섭>. <통섭>은 지난해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통섭은 ‘큰 줄기를 잡다, 모든 것을 다스린다, 총괄하여 관할하다’는 뜻임).

베리는 윌슨의 <통섭>으로 대표되는 현대 과학이 물질주의와 제국주의, 환원주의로 가득 차 있다고 ‘통박’한다. 현대 과학은 탐구의 자유를 주장하고 또 영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과학-기술-산업 체제에 편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순수 과학의 실험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험실의 문을 여닫는 것은 과학자가 아니라 시장이다.

윌슨은 “별들의 탄생에서 사회 제도의 운용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물리적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는 물질적 진행 과정에 근거한다”라고 주장한다. 현대 과학은 모든 것을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물질적·환원주의적 결정론에 빠져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확신에 빠져 있다고 베리는 지적한다. 베리가 보기에, 현대 과학은 모순투성이의 미신이다.

 
베리는 <삶은 기적이다>에서 ‘통섭’을 ‘(대)통합’이라고 표기한다. 역자인 이화여대 박경미 교수에 따르면, 통섭(Consilience)은 ‘함께(con)’와 ‘뛰어오르다, 도약하다(salire)’에서 나온 단어인데,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통섭(統攝)’으로 옮겨졌다. 통합이든 통섭이든, 저자와 역자는 윌슨의 주장이 책 제목에서처럼 폭력적이라고 파악한다. 베리는 윌슨이 과학의 이름으로 지식의 모든 영역을 통합하려는 야심을 전혀 감추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은 협상 테이블에 초대되지 않는다.

베리와 윌슨은 공통점이 거의 없다. 베리는 대학이라는 제도 밖에 있고, 윌슨은 대학 안에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차이이다. 둘째, 베리가 예술(인문학)과 종교의 대변인이라면, 윌슨은 현대 과학의 ‘추기경’이다. 셋째, 베리가 농사를 지으며 시골에 산다면, 윌슨은 도시에서 산다. 그리고 베리가 불가지론에 비중을 둔다면, 윌슨은 가지론을 신봉한다.

현대 과학 뒤쫓는 예술과 학문도 공격

언어에 특히 주목하는 베리는, 과학이 구사하는 언어가 산업적·상업적 무차별주의에 의해 조종되는 추상화·표본화·평균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진단한다. 베리는 인간의 삶, 인간이 속해 있는 이 우주는 인간의 언어, 즉 지식보다 훨씬 크며, 그 지식 또한 언어보다 크다고 이해한다. 여기에서 무지의 미덕, 즉 신비와 거룩함, 농업과 공동체, 친밀성과 지역성 등 오만한 과학·기술 시대가 추방한 문화에 대한 옹호가 나온다.

베리의 공격이 비단 과학-기술-산업 체제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과학을 뒤쫓고 있는 예술과 학문(대학)이 또한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이 숭배하고 있는 ‘최초의 발견’은 현대 예술에서 폭로나 실험과 같은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대학의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과학이 그랬듯이, 예술과 인문학 또한 전문가주의의 악순환, 즉 전문가 자신을 현실로부터 고립시키는 전문가주의의 아이러니가 광범위하게 출현한다.

 
그렇다면 과학과 예술이라는 두 문화는 영영 만날 수 없는 것일까? 베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학과 예술이 만나기 이전에, 과학과 예술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한계를 설정하고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현대 과학과 예술은 앎의 욕구와 표현의 범위에 관한 한 한계가 없다. 그러나 이 한계 없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인간과 자연을 파멸로 이끈다. 새로운 기준은, 우리의 궁극적 기준을 전문가주의나 이윤 추구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공동체의 건강과 지속성을 우선하라는 것이다.

베리는 현대 과학이 가혹할 정도로 무시해온 ‘무지’에 대해 눈을 돌려야 두 문화가 서로 연락을 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설명 불가능한 지식은 없는가?’라고 자문하라는 것이다. 입증될 수도, 설명될 수도, 가르치거나 배울 수도 없는 지식이 엄연하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두 문화는 서로에게 문을 연다는 것이다. 예컨대 꿈과 상상, 영감, 환상, 계시 같은 것들. 그것들을 통해 인간은 서로 소통하고 자연과 교감하며 과거와 미래를 연결짓기 때문이다.

윌슨의 <통섭>을 통박하는 베리의 서평을 읽다 보면 지난 연말에 나온 도정일·최재천의 <대담>(휴머니스트)이 자꾸 떠오른다. 베리의 입장이 인문학자 도정일 교수와 친밀하다면, 윌슨은 과학자 최재천 교수와 가깝다. 최재천 교수는 윌슨의 제자이기도 하다. <대담>을 읽은 독자들에게 이 책은 반가울 것이다. <대담>의 독자가 아니더라도, 과학·기술 지상주의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이 있는 독자라면, 황우석 사태에 대해 씁쓸해 하는 독자라면 ‘눈에 불을 켜고’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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