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이라 생각 않고 사랑 이야기만 그렸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6.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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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서생> 연출한 시나리오 작가 출신 김대우 감독 “위태로운 연인 관계 그리는 것이 언제나 즐거워”

 

김대우 감독(44)은 얼마 전까지 충무로에서 손꼽히는 시나리오 작가였다. <정사> <스캔들> <반칙왕> <로드무비> 등이 그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그가 <음란서생>으로 마침내 ‘자기 영화’를 찍었다. 코미디와 멜로로 버무린 사극에서 그는, 그가 자주 다루었던 사랑 이야기를 다시 풀어놓았다.

사헌부 장령 윤서(한석규)는 우연한 계기에 음란 소설을 접한 뒤 거기에 빠져든다. 자기 집안의 정적인 의금부 도사 광헌(이범수)을 삽화가로 끌어들인 윤서는 이윽고 그를 유혹한 정빈(김민정)과의 정사 과정을 음란 소설로 써가기 시작한다···.

영화는 주인공을 ‘작가’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암시되듯, 제목과 달리 성찰적이고 근본적이다. “행복을 얻는 데서 따라 오는 얻는 것과 잃는 것,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김감독은 말했다. <음란서생>이 개봉 닷새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날, 서울 시내 카페에서 김대우 감독과 만났다. 

<정사>(동생의 약혼자)와 <스캔들>(사촌 동생)에 이어 <음란서생>(왕의 후궁)까지 당신이 그리는 사랑은 늘 위태롭다.
나는 그런 사랑을 그리는 것이 좋다. 시나리오적으로 말하자면, 터부가 강할수록 감미로워지고 그럴수록 사랑이 갖는 속절없음이랄까 찰나적인 아름다움이 강조된다.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사랑은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하는 것이지만, 달리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인생사도 그렇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공맹을 배운 선비가 음란 소설에 빠져드는 과정이 좀 급작스러운데.
내 곁의 절벽을 느껴본 사람, 탄탄한 대로에서 갑작스럽게 나락으로 빠져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않을까.

자신의 이야기란 뜻인가?
구체적으로 내 이야기라기보다는, 중년을 넘어서면서 책임과 의무에 충실한 삶과 개인의 행복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내시관에서 왕이 정빈(김민정)을 세워두고 윤서(한석규)를 심문하는 신이 전체 영화 줄거리에서 좀 튀던데, 윤서의 대사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그 대사가 감독의 메시지처럼 여겨졌다.
사실 그 대사(‘사랑인지 음심인지 분간이 안되는데 어찌 사랑이라 말하겠나이까. 게다가 사랑이라 말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데 어찌 사랑이라 말하겠나이까’)를 쓰면서 행복했다. <정사> 때도 그런 문장이 있었다. 지구과학실에서 서현(이미숙)에게 건네는 우인(이정재)의 대사(‘당신은 사랑한다는 말도 못하죠. 점점 늙어갈 텐데, 아무도 당신 거들떠도 보지 않고 아무도 당신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안 해줄 텐데···’)를 쓰면서 울었다. 그때가 내 나이 서른일곱 살 땐데, 시나리오 쓰면서 울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이번에 윤서의 대사를 쓰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난데없다, 장르가 확 바뀌는 것 같다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 신을 고집했다.

코미디이자 멜로지만, ‘지식인 영화’라는 장르가 있다면 거기 넣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속 대사처럼 말하자면 ‘좀 젠체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도 그런가. 투자배급사에서 싫어하겠는걸. 흐름상 너무 무거운 부분이나 메시지가 담긴 부분은 뺐다. (이런 느낌은 영화와 시나리오를 함께 보았기 때문에 더했을 것이다. 시나리오에는 있지만 영화에서 빼버린 신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윤서를 납치한 ‘무명옷 남자’가 왜 자신을 최고 작가로 보느냐는 윤서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인봉거사는 사람들이 꿈꾸는 것을 쓰지. 당신은 당신이 꿈꾸는 걸 쓰고. 그런데 어떻게 상대가 되겠어. 당신은 첨부터 최고였어.” 그리고 ‘무명옷 남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너무 욕심 부리지 마. 최고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행복해야 되는 거야. 사랑받아서 행복한 게 아니고 행복하니까 사랑받는 거야.” 사실 이 대사야 말로 영화 <음란서생>의 주제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배우를 염두에 두었나?
어렴풋하게만. 캐스팅하고 나서 배우에 맞게 다듬었다. 가장 많이 바꾼 것은 황가(오달수)였다. 같이 읽어나가면서 오달수씨가 더 잘할 수 있는 쪽으로 말투를 교정했다. 

의금부 도사라면 이범수씨보다 더 강한 캐릭터를 연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처음부터 덩치는 있지만 기운이 없는 선비와 키는 작지만 완력이 강한 무관의 이야기를 그리려고 했다. 선비는 겁이 많고 나약하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순간 강해진다. 반면 무관은 공포스러운 대목에서 순진하고 나약해지고. 그런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의상이 화려하다. 고증을 거쳤나?
조선에 있던 것을 따왔지만 고증을 다 거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왕이 입던 의상의 형태는 고증을 거쳤지만, 재질은 복식 팀의 의견과 영상미를 중시했다. <음란서생>을 언론에서 퓨전 사극이라 부르던데, 나는 전혀 사극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배경만 따왔을 뿐 사실 역사가 없지 않나.

영화는 어떻게 시작했나?
대학 다닐 때 영화 서클에 있었지만, 졸업 후에는 유학을 떠났다. 처음에는 학부 전공대로 이탈리아에서 문학을 전공하다가 나중에 프랑스로 옮겨서 영화 학교에 들어갔다. 생활비를 벌 겸 시나리오 모집에 응모했는데 가작으로 붙었고, 귀국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시나리오 응모작 빼고, 처음으로 쓴 ‘자기 글’을 든다면.
<정사>다. 역시 주문을 받아 쓴 것이지만, 제목하고 연상녀와 연하남의 이야기라는 것만 듣고 나서 내 마음의 충동대로 썼다.

작품을 쓰면서 언제 ‘진맛’을 느끼나.
극중 윤서는 조선 최고의 문장가라는 말보다 황가가 안경을 건네면서 “작가는 이런 것 쓰고 다닌다니까”라는 한마디에 감격한다. 그것은 과거 작가 시절 내 경험이기도 하다. 작가는 지위가 아니라  ‘상태’에 대한 명칭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행복이란 찰나적인 것에서 온다.

감독으로서는 첫 작품인데 소감은?
작가일 때는 자유로운 상상력이 중요했는데, 연출은 제약들의 하모니인 것 같다. 전체 신이 다른 영화보다 훨씬 적은 100신밖에 안되는데, 러닝타임은 2시간17분이나 된다. 그래서 찍어놓고 편집 과정에서 빠진 부분이 좀 있다. 옛 말투에 대한 고민도 좀 적었던 것 같고. 그 밖의 것들은 다 만족스럽다. 스태프들한테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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