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파워’는 야욕에 흔들리지 않는다
  • 요코하마 · 레이 벤츄라 (아시아프레스 기자) ()
  • 승인 2006.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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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출신 언론인이 본 필리핀 정국

 
며칠 전 아침 나는 요코하마 우리 동네에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40대 후반의 한 남자가 무개 트럭에 폐지 뭉치를 싣는 모습을 보았다. 그 트럭 뒤에 때 묻고 누더기가 된 작은 필리핀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그 남자에게 웬 국기냐고 물었다. 

그는 자기 아내가 필리핀 사람이라고 답했다. 나는 일본어로 “와타시모 필리핀진데스(나도 필리핀 사람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당신네 나라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요. 필리핀에 비상 사태가 선포된 것은 아시오. 당신네 대통령은 ‘바카’(바보)요. 정부도 좋지 않소. 아무도 당신네 나라에 가지 않으려 하오. 나도 더 이상 그곳에 내 친구들을 데리고 가고 싶지 않소. 당신네 나라, 지금 굉장히 위험하던데”.

나는 맨 처음에는 ‘그렇게 겁이 나면 아예 우리 나라에 가지 마시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아로요 대통령을 좋아하오. 키도 작고, 여자 몸이지만 그녀는 큰 지도자요. 머리도 있고, 도둑도 아니오.” 이렇게 나는 말했다. 그러자 그의 반응. “그런데 왜 당신네 나라는 노상 그 모양이오. 필리핀에 대해서는 나쁜 말만 들어왔소. 빈민가, 산사태, 쿠데타, 게릴라, 혁명”

집에 돌아와 나는 내 사진첩을 뒤졌다. 1986년 2월 ‘피플 파워’ 혁명 때의 사진을 찾았다. 하드 디스크도 뒤졌다. 나는 당시 사진 기술을 막 배우던 참이었다. 사진기를 빌리고, 친구들에게 필름도 얻었다. 내 첫 사진은 혁명을 담은 것이었다. 말라카궁으로 가는 주요 거리인 만돌리나의 철조망 건너 중무장한 군인들, ‘승리의 브이 자를 그린 마르코스 광신도와 ‘라반(Laban·투쟁)’의 ‘엘’ 자를 그린 저항 세력의 대립, 대통령궁으로 향하는 좌파 무장 세력들, 탱크·전투기·헬리콥터, 캠프 크레임(반란 군인이 모여 있던 군 기지)의 정문을 기어오르고 있는 군중, ‘자유를’ ‘코리(코라손 아키노)·코리’ ‘라모스는 진짜 필리핀 사람’ ‘물러나라 마르코스’ 등을 적은 무수한 깃발들.

그러나 실제 내가 좋아하는 사진은 혁명이나 정치와는 상관이 없다. 그것은 여동생들이 내 어머니의 양옆에 서서 찍은 가족 사진이었다. 이 사진을 보노라면 지금도 향수에 젖는다. 가족 사진은 완전 무장한 군인들 사진·수많은 군중 사진과 나란히 있었다. 이 사진의 여동생들은 순진무구한 고등학생 모습이다. 20년이 지난 오늘날, 하나는 의사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캐나다 시민권자가 되었다. 아로요 대통령이 비상 사태를 선포한 며칠 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우리 나라에 다시 큰일이 났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20년 전과 똑같이 걱정했다.

어머니가 몰랐던 사실인데, 1986년 당시 나는 필리핀 공산당원이었다. 그것도 간부로 6년 동안 일했다. 나는 공산주의자로 ‘적들’의 사진을 찍었다. 독재자의 군대와 반군의 군대도 찍었다. 나는 ‘적의 전선’ 배후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순전히 사진술을 익히려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만약 내가 지하 조직원이라는 사실을 어머니가 아셨더라면 밤잠을 설치셨을 것이다.

전화에 대고 어머니는 물으셨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또 봉기를 겪게 되는 것이냐’ 등등. 나는 ‘1986년 혁명 같은 것은 없으니 걱정 마시라’라고 안심시켜드렸다.

혁명은 그 하나로 독특하고 자기 논리를 따르며, 되풀이되지 않는다. 혁명은 한 번만 일어난다. 바로 여기에 필리핀 공산주의자, 활동가, 우익 쿠데타 음모 세력의 근본적인 착오가 숨어 있다. 그들은 피플 파워 혁명을 되풀이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하루에 두 번 해가 뜨기를 원하는 것이다.

구태 정치인이 된 아키노에 국민들 냉담

1986년 2월 피플 파워 혁명의 첫째 요소는 자연 발생성(spontaneity)이었다. 감정의 자연 발생적인 폭발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약 100만 민중이 정부군 사이에 포위된 저항군을 구하기 위해 에드사(EDSA·필리핀 대통령궁을 향하는 도로)로 진군할 때 고(故) 하이메 신 추기경의 신호를 기다렸다. 포위된 군인들에 대한 동정과 독재자에 대한 분노가 넘쳐났다. 

그때 나는 호기심 때문에 그곳으로 갔다. 나 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혁명의 두 번째 요소는 호기심이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궁금해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했다. 에드사 도로와 멘디올라의 길에서 사흘 밤낮 동안 나는 혁명에 동참했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혁명이 일어나는 동안 그 누구도 그것이 혁명인 줄로 생각도, 상상도, 알지도 못했다.

 
지난 2월24일, 즉 혁명 20주년에 필리핀의 야당, 공산주의자, 우익 군부 반군은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을 축출하려 했다. 그들은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초장에 물거품이 되었다. 아로요 대통령은 비상 사태를 곧장 선포해 그들의 음모를 싹부터 잘라냈다. 비판 세력이나 적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현명한 대응이었다. 극렬하고도 권력에 굶주린 반대 세력들은 ‘대통령 여사’의 단호한 의지를 과소평가했다. 그들의 ‘수컷 기질’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들은 여성 대통령이 그처럼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지난 38년 동안 게릴라전을 지속해온, 그러면서도 권력 장악에 필사적인 공산주의자들은 똑같이 기회주의적인 우익 군부 반란 세력과 전술적인 동맹을 맺었다. 두 극단 사이의 동맹이었다. 우익 반란 세력들은 아키노 정권(1989~1991) 때에도 아홉 번에 걸쳐 쿠데타를 시도했다. 라모스 정부는 군사 반란자들을 사면했다. 반란 군인들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있었지만 처벌받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 지도자는 상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 이 세력들이 아로요 정부 아래에서 ‘피플 파워’의 이름을 빌려 또 한 번 쿠데타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11번째 쿠데타 시도 또한 실패했다. 민중이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 발생적인 지지의 폭발도 없었다. 민중은 더 이상 호기심도 없었다. 오직 시위대 수백 명만이 (돈을 받고) 참여한 것이다.

서글픈 일은 ‘에드사 혁명(피플 파워 혁명의 또 다른 이름)의 어머니’이자 스스로를 마르코스의 ‘진정한 맞수’라고 자부했던 코라손 아키노가 구태 정치인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번에 야당 세력과 연대해 아로요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위기가 절정에 올랐을 때 아키노는 다른 신부·수녀들과 함께 군사 대치 상황이 벌어졌던 필리핀 해군본부 앞에 모여 기도를 올렸다. 1986년 에드사 혁명을 흉내낸 것이다. 그러나 한 줌도 안 되는 군중만이 그녀와 함께했다. 다행히 몇 시간 만에 군부의 내분은 해소되었다. 아키노 여사의 ‘피플 파워’는 어둠과 함께 사라졌다.

코라손 아키노는 지켜야 할 이해가 많은 정치인이 되었다. 그녀 일가는 6천3백㏊에 달하는, 필리핀에서 단일 규모로는 두 번째로 큰 땅을 소유하고 있다. 대통령 시절인 1989년 그녀는 농업개혁 계획에 서명한 바 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토지는 이 개혁에 적용시켰지만, 정작 자기 재산은 제외시켰다. 그러나 지금, 아로요 정부는 바로 이들 토지를 토지 개혁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광대한 사탕수수 밭을 4천여 농민·소작인에게 분배하려고 한다. 그 기한이 오는 5월이다. 이 점에서 왜 아키노가 아로요의 사임을 요구했는가는 쉽게 이해할 만하다.

다시 며칠 전 쓰레기 치울 때의 장면. 나는 폐지를 줍는 그 남자에게 말했다. “마닐라에 긴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얼마 못 갈 거요.” “나도 그러길 바라오. 내 친구 가운데 필리핀인과 결혼한 사람도 있으니까.” 그가 대꾸했다. “그거 좋소.” 나는 답했다. 그가 또 말했다. “필리핀 사람들 참 열심히 일하지. 당신도 그렇소?” “글쎄, 그러려고 하는데….” “무슨 일 하시오?” “내 글을 쓰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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