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굴 생활’ 꿈꾸는 거리의 디자이너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6.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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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메시지’ 전 여는 윤호섭 교수 폐품 활용해 친환경 디자인 실천
 
 우리 앞으로는 하루하루 수없이 많은 물건이 다가온다. 그 중에는 볼펜이나 그릇처럼 한동안 두고 쓰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회용 컵이나 신문지처럼 순식간에 제구실을 다하고 쓰레기통으로 사라진다.

윤호섭 교수(63·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는 사라지는 그 폐품들을 아낀다. 때문에 보는 족족 가방에 담거나 자신의 연구실로 소중히 들고 온다. 매일매일 그것들을 들여다보며 그는 상상을 나래를 펼친다. ‘저것이 더 커지면?’ ‘저것이 더 많아지면?’ ‘저것을 화성 표면에 갖다 놓으면?’ ‘저것이 다른 것과 어울리면?’ ‘저것에 초록색을 칠하면?’ ‘저것을 공중에 띄우면?’ ‘저것을 뒤집으면?’ ‘저것에 불을 붙이면?’ 하고.

 시간이 지나면 엉뚱한 상상은 발랄한 결과물을 낳는다. 먹고 버린 어묵 꼬챙이는 모여서 의자가 되고, 수천 개의 낙엽과 커피믹스 봉지는 향긋한 방석이 되고, 쓰고 난 ‘유리창 봉투’는 작은 액자가 되고, 철 지난 현수막은 손가방이 되는 식이다. 어찌 보면 어린아이 놀이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다. 실제 그는 유치원 아이처럼 놀면서 작업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면서 “그 덕에 삶이 재미있고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그의 ‘기발한 작품’들이 요즘 서울 대학로 ‘국민대 제로원 디자인센터’에 나와 있다. 4월2일까지 열리는 ‘윤호섭이 만드는 하루하루의 녹색 메시지’전에 출품된 것이다. 전시장은 쓰레기 매립장에서 유해 물질로 전락하기 직전의 허섭스레기들을 모아놓은 탓인지, 약간 어수선한 느낌이다. 그러나 잠시 발걸음을 멈추면 산만함은 정겨움으로 바뀐다. 버려진 듯 놓인 작은 물건 하나하나에 얽혀 있는 애틋한 사연 때문이다. 윤교수는 관람객 곁에 서서 그 사연을 자연·환경·생태계 같은 단어를 섞어가며 들려준다.
 
일본인과의 만남으로 인생 항로 바뀌어

2000년부터 그는 ‘행동하는 환경 디자이너’로 불려왔다. 학교에서, 거리에서, 사이버 세상에서 잔잔하지만 호소력 있는 ‘환경 메시지’를 전파해온 것이다. 서울 인사동에서 펼치는 ‘환경 티셔츠 퍼포먼스’도 뜻깊은 작업 중의 하나이다. 거리에서 흰 티셔츠에 고래나 황새 따위를 그려 주면서 지구 생태계의 위험한 오늘을 고발하는 그의 모습은 ‘행동하는 양심’ 그 자체이다.

언젠가는 버려지는 신문에 고래와 새와 사람을 그려 넣는 퍼포먼스도 했다. 수만 부의 신문이 곧바로 폐기되는 야만적인 행위를 붓으로 고발한 것이다. 요즘 그는 고래·황새·꼬리치레도롱뇽 같은 희귀·멸종 동물을 복원하고 보호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일상에서도 그는 친환경적이다. 몇 년 전에 자동차와 냉장고를 없앴고, 바지나 셔츠를 두세 장만 두고 모두 처분했다. 특히 바지는 겨울용 한 장, 여름용 두 장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바지 한 장으로 긴긴 겨울을 날까 싶었다. “다행히 빨리 마르는 옷감이어서, 잠자기 전에 빨아놓으면 아침에는 입을 수 있다”라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열혈 환경 운동가지만, 10여 년 전에는 그도 환경과 아무 관련이 없는 디자인학과 교수일 뿐이었다. 그를 뒤바꿔 놓은 것은 일본인 학생이었다. 1991년, 그는 설악산에서 열린 세계잼버리대회 엠블럼과 포스터를 제작한 뒤 사인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일본의 유년 대원 미야시다 마사요시 군을 만났다. 소년은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찾아냈는가?’ ‘엠블럼 그리는 데 얼마나 걸렸는가?’ 등을 물었다. 

 
 이후 미야시다와 그는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수시로 일본에 들러 그는 환경 운동가로 변신한 마야시다로부터 환경 운동에 대해 배웠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나 자신이 얼마나 환경에 무지했는지 깨달았다”라고 그는 돌이켰다. 1990년대 말부터 그는 삶의 화두를 ‘환경’으로 정했다. 그때부터 모든 폐품이 새롭게 다가왔고, 그것들을 껴안았다. 강단에서는 예쁘고 세련된 이미지의 디자인을 벗어던지고 그린(친환경) 디자인을 제시했다. 조형대학장 시절에는 아예 ‘그린 디자인전’을 열어 학내외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윤호섭이 만드는 하루하루의 녹색 메시지’전은 그가 10년 넘게 실천해온 ‘녹색 디자인’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이다. 2월 마지막 날, 그곳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지구를 걷는 환경 운동가 폴 콜먼(50·영국)이 나타난 것이다. 콜먼은 1990년부터 38개국 4만3천km를 걸으며 10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어온 환경 운동가. 그는 윤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연신 ‘환상적이다’라고 감탄했다. 특히 티셔츠에 자연 소재로 고래나 황새 등을 그리는 것을 두고 “지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감동적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환상적이고 감동적인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로원 디자인센터에는 일반인의 발길이 뜸하다. 그런데도 윤교수의 얼굴은 환했다. 무엇이 소중한지 아는 사람은 꼭 찾아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의 꿈은 소박하다. 대학을 정년퇴직하고 굴을 파고 생활하거나, 몽골 천막 게르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적게 쓰고, 더 적게 먹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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