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폐’ 해결하고 연락사무소 여나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6.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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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북한, 양자 대화 채널 복원 조짐

 
북·미 관계의 변곡점을 알리는 사나이. 리 근 북한 외교부 미주국장, 그가 다시 돌아왔다. 지난 몇 년간 그의 방미는 북·미 관계의 ‘업 앤드 다운’을 예고하는 선행지표였다. 지난 2004년 8월5일의 방미는 실패였다. 그 결과 양자 관계에 암흑의 터널이 1년간 계속되었다. 약 1년 후인 2005년 6월30일. 그는 다시 미국을 찾았고, 이번에는 돌파구를 열었다. 7월9일 힐-김계관의 베이징 비밀 회동, 그리고 4차 6자회담 개막으로 이어졌다.

이번 등장은 앞의 두 차례와 똑같은 패턴이다. 이번에도 전미외교정책협의회(NCAFP)라는 반관 반민 단체의 초청이고, 위폐 문제로 인한 북·미간 경색국면 해소가 목표이다. 이번에는 과연 어떤 결과를 내놓을까.

그의 방미 결과를 둘러싸고, 일각에서는 들뜬 분위기마저 읽힌다. 북한과 미국이 이번에는 뭔가 접점을 찾을 것 같다는 얘기다. 현안인 위폐 문제 해결뿐 아니라, 지난 6년간, 즉 부시 정부 등장 이후 단절된 북·미 양자 대화 채널이 복원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일, 뉴욕에서 미국측과 만난 뒤 그는 한겨레와의 인터뷰를 통해 접촉 내용을 소상히 밝혔다. 그 중 위폐 문제 해결을 위해 북·미간 ‘비상설 협의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그의 이 제안에 대해 미국측은 일단 검토해보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최근 워싱턴의 분위기를 보면, 어떤 형태가 되었건 북한과의 양자 채널 형성에 매우 적극적이라는 점이 감지된다. 북·미 관계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물론, 현재 위폐 문제라는 난제가 버티고 있다. 따라서 출발은 여기서부터다. <한겨레> 인터뷰에서 리 근 국장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즉 ‘우리 정부는 위폐 제조와 무관하다’고 강조한 뒤 ‘미국이 관련 정보를 제공해주면, 제조자를 붙잡고 종이 잉크 등을 압수한 뒤 미국 재무부에 통보할 수 있다’이다.

위폐 문제의 본질과 북·미 양자가 그동안 수면 하에서 추구해온 해법이 뭔지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우선 미국의 입장에서 북한산 위폐의 문제는 바로 ‘너무 잘 만들었다’는 데 있다. 미국이 가지고 있는 감별기를 모두 통과할 정도로 진폐와 구분이 안 된다. 그대로 방치할 경우 달러 유통 체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이 문제는 미국 행정부 이전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P)를 축으로 한 미금융자본의 핵심 아젠다이다.

따라서 해법은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 바로 북이 위폐를 제조할 수 없도록 동판을 회수하는 것이다.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가 지난번에 이 얘기를 꺼냈지만, 이는 그의 얘기라기보다 금융자본 세력의 요구라는 게 더 정확하다.

 두 번째 요구 사항이 바로 제조 현장 방문이다. 확실하게 폐기가 되었는지 직접 보아야겠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궁금증을 해소할 목적도 있는 것 같다. 즉 어떻게 그렇게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이 재발 방지 약속이다. 시중에는 위폐와 관련해 여러 가지 음모론도 있지만, 북한산의 뛰어난 위폐가 유통된 것은 사실이라고 할 때, 이 세 가지는 미국 입장에서는 당연한 요구라는 것이다.

북한, 미국에 ‘비상설 협의체’ 제안

북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국내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그러나 북한은 그동안 조금씩 입장을 바꿔왔다. 국내의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은 이번 기회에 위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우선 북한 정부가 개입되었다는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조건이 맞으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금융 제재 해제, 그리고 궁극적으로 적대 관계 해소를 위한 조치들을 미국이 약속하고 이행하는 것이다.

의외로 북한이 위폐 문제에 신축성을 발휘할수 있다고 보는 것은, 바로 북한이 위폐 제조에 부여하고 있는 성격 때문이다. 즉, 위폐 발행은 ‘돈벌이 때문이 아니라, 미국과의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전시 교란책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경제적 목적이 아니라 외교·안보·군사적 목적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양자간 적대 관계가 해소되면 자연히 발행 목적도 소멸한다. 동판을 넘겨주거나 현장을 방문하게 하는 일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앞의 리 근 국장 발언에 바로 그런 의미가 다 포함되어있다. 동판 얘기는 없지만, 당연히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리 근 국장은 이번에 아주 밝은 표정이었다. 미국측도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리국장이 평양으로 돌아가면, 방미 결과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 다음 후속 협의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가 주목된다. 워싱턴 일각에서는 조만간 미국 대표단이 비공식적으로 평양을 방문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번에 협의된 내용을 발판으로 위폐뿐 아니라 북·미 관계 전반의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방문단이다.

양자의 그림이 맞추어지면, 차례로 가시적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즉 물 밑에서 동판을 건네고, 실사가 이루어지는 것과 함께 미국측도 단계적으로 선물을 제공한다. 1차적으로는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에 대한 미국의 금융 제재를 해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리국장이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북한은 6자회담에 복귀한다.

 
6자회담 트랙과 별개로 북·미 양자 틀은 계속 유지된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비상설 협의체’를 만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비상설 협의체는 위폐를 넘어 북·미 양자의 현안 문제를 계속 다루어나가는 북·미 대화의 틀로 발전해나갈 것이다.

양자 관계의 최대 현안은 무엇인가. 바로  연락사무소 개설 문제다. <시사저널>이 그동안 여러 차례 지적한 바와 같이, 라이스 국무장관 등장 직후인 지난해 2월, 미국은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을 대북 정책의 숨은 목표로 설정했다. 그 책임자로 버시바우 대사가 주한대사로 부임했고, 또한 연락사무소 협의를 위한 양자 대화 채널을 확보하기 위해, 때마침 불거진 위폐 문제를 활용해왔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즐겨 사용하는 일종의 ‘업 앤드 다운 전략’인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6, 7월께 북·미간 이면 접촉에서 있었던 얘기다. 북측이 ‘2005년 말까지 연락사무소 개설 등 북·미 현안을 타결하기를 희망한다’고 하자, 미국측은 라이스 국무장관의 뜻이라고 하면서 그 시점을 ‘2006년 3월’ 이후로 늦추어서 제시했다고 한다. 왜 3월 이후인지, 그동안 가장 큰 수수께끼였다.

미국측 대표단, 비공식 방북 가능성

이제 그 3월이 되어 보니, 라이스의 생각이 뭔지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지난 3월7일 하루 동안 있었던 일 속에 전부 함축되어 있다. 이날은 뉴욕에서 북·미간 접촉이 이루어진 날이다. 그런데 이날 미국 의회에서 공화당의 짐 리치 하원 동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 위원장이 ‘중대 제안’을 했다. 즉 ‘ ‘소멸’ 위기에 처한 6자회담을 되살리기 위해 힐 차관보를 평양에 보내고, 한반도의 영구 평화 체제를 위한 협상에 대해 빨리 검토하며, 북·미 양국 정부 간 의사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이 바로 양국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할 가능성을 모색할 시기’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날 미국의 갑작스런 전환의 배경을 짚어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또 한 가지 상황이 연출되었다. 중동의 뜨거운 현안인 이란 핵문제에 대해 라이스 국무장관과 체니 부통령이 유엔 안보리 회부와 유사시 무력 사용 검토까지 포함하는 ‘최후 통첩성’ 발언을 줄줄이 쏟아낸 것이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미국 정책 당국자들의 습성과 관련해, “지구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여러 현안을 상호 유기적으로 관련지어 해법을 마련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3월7일 발생한 세 가지 사안이 서로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매우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워싱턴의 최근 동향 속에서도 파악이 가능하다. 즉 체니가 주도하는 군산복합체의 군비 증강 흐름이 최근 이란을 중심으로 몰리고 있는 반면, 미국 국무부는 북한과의 쌍무관계의 진전을 담은 보고서를 최근 완성해 이제 실행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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