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대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남문희 전문기자 (bulgsisapress.com.kr)
  • 승인 2006.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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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리 근 미주국장 방미는 ‘2라운드 회담’ 위한 전초전

 
리 근(북한 외교부 미주국 국장) 방미를 계기로 북·미 관계의 돌파구를 열고자 한 양측 대화파의 시도는 일단 벽에 부딪혔다. 그러나 그것은 ‘벽’일 뿐, 대화의 ‘끝’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었음에도 ‘유익했다’(리 근), ‘생산적이었다’(버시바우)는 평가가 뒤따르고 있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리 근 방미’의 실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무엇 때문에 벽에 부딪혔고, ‘생산적이었다’고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순서대로 살펴보자. 리 근 방미를 앞두고 대부분의 관측통들은 그의 방미가 북미 양자 채널을 여는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의 방미 전야, 워싱턴의 공기가 바로 이런 관측을 가능하게 했다. 한마디로 ‘북이 부분적으로라도 위폐와 관련한 사실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해 미국의 체면을 세워주면, 미국도 해빙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워싱턴의 분위기가 이렇게 누그러진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위폐 문제와 관련해 ‘북한 정부 차원의 범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내놓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근 호주 법원이 불법 마약운반선으로 낙인찍혔던 북한의 봉수호를 무죄 방면한 사실도 워싱턴을 낙담시켰다.

국제 정세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란 핵 문제가 미국 대외 정책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했으나, 러시아와 관계가 틀어져 유엔 안보리에서 공조를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 문제로 들어오면, ‘중국의 변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남에 따라 정책 방향을 틀어야 할 지경이다. 즉 지난 1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전격적인 방중 과정에서 드러난 중국의 태도는 더 이상 ‘북핵 해결을 위한 공조 파트너로서의 중국’이 아님을 실감케 했다.

미국 국무부 내에서는 북·중 관계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미국이 ‘대세를 잃을지 모른다’는 초조감도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번 리 근 방미를 계기로 ‘중국을 통하지 않은 북한과의 양자 채널 구축’이 과연 가능한지를 탐색하고자 한 것이다. 

방미 첫날 분위기는 좋았다. 3월6일 비공개로 열린 전미외교정책협의회(NCAFP) 세미나에서 리 근은 매우 고무적인 발언을 했다. 3월9일자 교토통신은 이 세미나에서 리 근이 ‘금융 문제와 핵 문제를 연계할 생각이 없다’ ‘미국과 긴밀한 양자 협의를 추진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전자는 위폐 문제와 무관하게 6자회담에 참여하겠다는 뜻으로 비춰졌고, 후자는 양자 채널과 관련해 북한도 미국 국무부 등 대화파와 같은 뜻이라는 점을 밝힌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위폐 문제를 앞세운 미국의 공세가 북을 압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라며 강력 반발해왔다. 그러나 점차 위폐 문제의 이면에 ‘중국과 무관한 직접 채널을 구축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감을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번 방미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워싱턴 소식통은 말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리 근이 밝힌 양자 채널은 기존 외교부 수준을 뛰어넘는 고위급 채널을 포함한 것으로, 미국 내 대화파를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3월6일 세미나 후 미국 측이 ‘좋은 징후’라며 환영의 뜻을 표한 데서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리 근, 위폐 문제에는 ‘뻣뻣한 자세’로 일관

문제는 그 다음 날의 뉴욕 접촉이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식의 논쟁이 재연되고 말았다. 미국측에서는 국무부, 재무부, 국가안보회의(NSC) 등에서 고위 당국자와 전문가들이 대거 참석했다. 위폐 문제 주무 부서인 재무부측은 북이 ‘국제 관례’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 관례’란 과거 미국이 콜롬비아 등의 위폐 문제를 해결할 때 적용했던 방식을 말하는 것으로, ‘사실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동판 회수, 제조 지역 사찰’ 같은 내용을 포함한 것이다. 여기에 언론 보도대로 아시아태평양 자금세탁 방지기구(APG) 가입을 권유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들이 선행되어야 미국과 양자 채널을 가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리 근이 다녀간 뒤 워싱턴에는 ‘북이 의외로 매우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미국이 체면을 살리면서 방향을 틀 만한 얘기가 전혀 없었다’는 따위 말이 퍼져 있다. 즉 이날 북·미 접촉에서 사실 인정 부분에서부터 전혀 굽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대북 정보 소식통은 그 이유를 평양을 출발할 때 리 근이 받아온 ‘상층부의 지침’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즉 이번 방미의 최대 목적은 ‘미국의 생각을 청취하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미국에게 먼저 조처를 요구하라’는 것, 6자회담은 ‘미국이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에 대한 제재를 먼저 선행하면 복귀하겠다는 것’ 그리고 위폐 문제는 그 이후 ‘비상설 협의체를 구성해 하자’고 하라는 것 등이다.

미국 재무부나 법무부측에서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즉 미국이 선결 조처를 내놓으라는 것도 그렇고, 비상설 협의체 안 역시 ‘위폐 문제는 북한과 협의할 문제가 아니다’라는 기존 입장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반면 국무부는 리 근이 전날부터 밝힌 ‘고위급 북미 양자 채널’의 불씨를 살리고 싶어 했다. 따라서 절충안을 제시했다. 즉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면, 그 안에서 양자 대화를 열어 위폐 문제와 관계 정상화 문제를 다룰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국무부의 타협안에 대해 리 근은 답변을 ‘유보’했다. 자신의 재량 범위를 넘는 문제이므로 평양에 돌아가 협의한 뒤 답하겠다고 한 것이다.

리근이 다녀간 뒤 워싱턴 분위기는 재무부와 법무부 등 담당 부서의 ‘원칙론’과 이에 기반한 대북 압박론에 일단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여기에는, 3월10일자 뉴욕 타임스 보도대로, ‘금융 제재가 북한의 신경망을 강타하는 기대 밖의 효과를 낳았다’고 희희낙락하는 ‘금융 제재 유효론자’에서부터, ‘리 근 정도의 급을 불러놓고 유야무야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네오콘의 반발, ‘압박의 수위를 높여 판을 키운 뒤 고위급을 끌어내 타결하자’는 국무부 일각의 목소리 등이 뒤섞여 있다. 부시 미 대통령 역시 일단 원칙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대치 국면이 오래가서는 안 된다는 대화파들의 우려 목소리 역시 커지고 있다. 지난 3월14일 ‘뉴욕 접촉은 매우 생산적이었다’면서 북에 대해 ‘6자회담 틀 안에서 양자대화를 갖자’는 국무부 입장을 다시 한번 강조한 버시바우 대사의 발언이나, 최근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를 통해 북·미 양자 대화와 연락사무소 개설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 나선 공화당 하원의원인 짐 리치 아·태 소위위원장의 발언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짐 리치 의원은 지난 3월7일 의회 연설에서 힐 차관보의 평양 방문을 주장한 데 이어 이번에는 북한 고위급의 워싱턴 방문을 통해서라도 양자 대화를 해야 하며,  연락사무소에 대해서도 ‘북이 핵 포기를 위한 조처를 취할 때, 구체적으로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받아들이는 시점’에 개설하자고 제안하는 등 목소리 톤을 더욱 높였다.

‘2라운드 회담’을 위한 암중모색이 시작되었다는 얘기가 워싱턴 일각에서 들려오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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