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 가치 높여야 산다
  • 김종수 <연합뉴스> 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2006.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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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자본, 한국 기업 사냥 본격화…민족주의적 접근은 효과 없어

 
지난 1월18일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FT)에는 기사 한 편이 실렸다. 미국에서도 ‘기업 사냥꾼’으로 잘 알려진 칼 아이칸이 지난해  KT&G측에 주가 부양을 요구하며 자회사인 인삼공사와 일부 자산의  매각을 요구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실은 국내 투자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2주가량 뒤인  2월3일 장 마감을 전후해 주식 시장과 국내 언론은 발칵 뒤집혔다. 1980년대부터 TWA항공, 나비스코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 등으로 M&A 교과서에나 등장하는 줄 알았던 70대 노(老) ‘기업 사냥꾼’이 KT&G 지분을 6.59%나 ‘경영 참여 목적’으로 갖고 있다는 내용의 공시와 함께 한국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아이칸 편대’가 한국 시장에 공습 경보를 발령한 순간이었다. 이 소식은 또한 3년 전 SK주식회사 주식을 대거 매집해 재계를 공포에 떨게 한  소버린의 등장을 상기시켰다.

아이칸측은 이미 지난해 9월28일부터 무려 수십 차례 조금씩 KT&G 지분을 사들이는 노련한 매집 수완을 보였다. 물밑에서 주식을 매집하면서 파이낸셜 타임스의 보도처럼 지난해 10월 KT&G측과 접촉해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전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주주총회를 앞두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들은 이사회에 자기네가 추천한 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할 것을 요구했다.

  그때부터 KT&G는 불난 호떡집 같았다. 곽영균 KT&G 사장이 부랴부랴 지난달 14일 해외 기업설명회(IR)에 나서  주주 설득 작업에 들어갔으며, 타임워너 경영권 분쟁에서 아이칸을 몰아낸 ‘천적’ 골드만삭스 등과 경영권 방어 자문 계약을 맺는 등 바삐 움직였다. 하지만 한 발 늦은 뒤였다.
    이미 주총에서 7.7%의 의결권을 가진 KT&G의 1대 주주 프랭클린뮤추얼펀드가  아이칸 지지를 선언한 터였다. KT&G의 파악으로도 35%가량의 주주가 아이칸측에 가담했고, 그렇다면 정관에 규정된 집중투표제에 따라 도리없이 적어도 한 명의 사외이사 자리를 아이칸 측에 넘겨줘야 할 처지에 내몰린 것이다.
    물론 곽 사장은 "이사 한 명이 들어와도 경영의 큰 틀은 바뀌지 않는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증권가에서는 이후 전개될 상황이 그리 녹록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이칸도 아이칸이려니와 아이칸 편대의 일원이자 지난 3월17일 KT&G 정기 주주총회에서 치열한 표대결 결과 사외 이사 자리를 따낸 워렌 G. 리크텐슈타인(41)도 전적이 만만찮은 인물인 탓이다.

 리크텐슈타인이 이끄는 스틸파트너스는 2003년 일본에서 유시로화학을 공개 매수해 주가를 끌어올려 시세 차익을 남겼고 지난해부터는 묘조식품과 불독소스, 닛신식품 등에도 적대적 매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크게 보면 KT&G는 이들의 ‘동아시아 공략 작업’의 일환인 셈이다.

  KT&G가 공격을 받자 우량 기업이면서 대주주 지분이 적은 기업들, 대표적으로 포스코가 다음 표적이 될 것이라는 불안한 관측까지 제기되고 있다. 포스코의 핵심 주주이자 우호 세력인 포항공대와 국민연금, SK텔레콤 모두 지분율이 3%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계 얼라이언스번스타인이 5%대였던 지분율을 3월 들어 7.86%까지 끌어올리자 이런 우려는 더욱 증폭되고 있는 형국이다.

아이칸이 어떻게든 자기네 추천 인사를 이사회에 집어넣으려 했고 결국 성공한 것에서 보이듯, 아이칸이나  리크텐슈타인은 할리우드 액션처럼 주가를 좀 올려 단기 차익을 얻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이른바 ‘그린 메일러형’ 잔챙이가 아니다. 세계 M&A 시장에서 손꼽히는 거물급 기업 사냥꾼들이다.

‘국민 기업’ 포스코가 위험하다?

 아이칸은 과거 TWA 항공사를 M&A한 이후 스스로 회장직을 맡은 경력도 있다. 물론 현재까지 상황만 보면 아이칸측이 실제 경영권을 장악하는 데까지 이를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KT&G의 외국인 지분이 69.7%에 이르지만 모두 아이칸의 우군이 아니다. 3.4%의 의결권을 가진 국민연금과 국내 기관 투자가들은 KT&G측을 지지하고 있다(의결권 기준으로 이들이 가진 지분율은 30.23%). 특히 ‘토종 자본 연합론’을 제창한 황영기 행장의 우리은행과 기업은행이 아이칸측에 맞서 전체 발행 주식의 10%에 가까운 KT&G 자사주를 사들일 채비를 갖추고 있다.

 문제는 오히려 ‘KT&G 이후’다.  글로벌경제 시대에 M&A를 ‘민족 경제론’적 시각에서 계속 재단할 것인지도 두통거리일 수밖에 없고, 외국 주주들의 경영 투명화 압력과 감시 요구를  모조리 M&A 시도로 몰아붙여 특별한 경영권 방어 장치를 요구하는 재벌들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고민거리인 것이다. 적대적 M&A의 보편화라는 추세를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삼성증권은 지난 14일 M&A 문제에 대한 공개 보고서를 통해 앞으로 수년 내 한국 증시에서 적대적 M&A 시도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삼성증권은 간접 투자 상품인 펀드로 대거 돈이 유입되고 있는 데다 확산과 주로 남의 돈을 빌려 기업을 사들이는 ‘차입형 인수(LBO)’ 붐이 부는 한국의 현 상황이 M&A 열풍이 일었던 1980년대 미국과 ‘닮은꼴’이라는 점을 주된 근거로 들고 있다. 여기다 최근 레노보의 IBM PC 부문 인수에서 보듯, 급격하게 확충된 중국 기업들의 자본력이 결국 기술 흡수 등을 위해 해외로 흘러나와 M&A에 쓰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꼽고 있다.

주주가치를 높이는 데 게을리 하는 기업이나 사전적 경영권 방어 대책이 없는 기업들을 이런 식으로 계속 지켜내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당장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푸르덴셜자산운용의 이창훈 대표는 최근 기자 간담회에서 “우리 사회가 이번 사태를 보는 시각은 이분법적이다. 민족주의적·감정적 접근보다는 경제적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본을 ‘윤리’나 ‘민족’ 차원에서 비난해봐야 소용이 없다. 결국 주주가치를 높이고 스스로 방어책을 갖춘 기업만이 칼 아이칸 같은 기업 사냥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나쁘다고? 너나 잘하세요

지난해 3월 한국의 경제 관료들은 하루아침에 ‘정신병자’로 전락했다. 파이낸셜 타임스가 기업들의 M&A와 관련, 지분 보유 목적과 자금 등을 자세히 설명하도록 한 ‘5%룰’ 개정안에 대해 ‘정신분열증적(schizophrenic)’이라는 표현을 쓰며 비난한 것이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만 그런 것도 아니다. 미국 금융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월스트리트 저널은 3월14일자 사설에서 “아이칸이 한국에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라고 거들고 나서는 등 넓은 오지랖을 과시했다.

하지만 정작 미국은 자국에서 ‘옳은 일’을 하려는 외국인을 방해하고 있다.  미국이 1988년 도입한 엑슨-플로리오법에는 연방정부가 국가 안보 차원에서 외국 자본의 투자를 조사해 철회시킬 수 있도록 하는 근거 조항이 들어 있다. 여기에 최근 미국의 여섯 개  항만운영권을 인수하려던 아랍에미리트 두바이포트월드는 ‘애국주의적’인 정치권의 등쌀에 못이겨 결국 이를 미국 기업에 양도해야만 했다. 지난해에는 미국의 석유 기업 유노칼을 인수하려던 중국해양석유도 미국 정부와 의회의 방해로 충분한 자금을 갖고도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 중국 PC 업체 레노보는 IBM이 수익성이 없어 매물로 내놓은 이 회사 PC사업부를 인수하면서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미국 정치권의 요구로 국토안보부와 국방부가 포함된 외국인투자위원회의 심의 통과를 기다려야 했다.

외국인의 국내 기업 인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정답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기업의 경영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서 기업을 사고 파는 ‘경영권 시장’의 존재는 꼭 필요하다는 게 시장의 법칙이다. 잘못하면 경영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만큼 경영자 감시에 좋은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국의 대표 산업이나 기업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는 것에 부정적 여론이 일고 국가 기간 산업 등에 대해 법적 규제 장치를 두는 것은 미국뿐만 아니라 대부분 국가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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