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 정면 돌파 승부 걸다
  • 이숙이 기자 (sookyiya@sisapress.com)
  • 승인 2006.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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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열린우리당을 위해 이해찬 총리를 경질하자 정동영 의장은 정치 생명을 걸고 지방선거에 올인’하고 있다.

 
3월14일 오후 2시께. 청와대로 향하는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만에 하나 노무현 대통령이 이해찬 총리에 대한 사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뒷감당을 할 일이 아득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아프리카를 순방하는 동안 그가 보기에는 청와대 안의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기도 했던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오후 2시40분 정의장을 마주한 노대통령은 아직 결심을 굳히지 못하고 있었다. 노대통령이 가장 우려한 대목은 역시 후임 문제였다. 이해찬 총리가 분권형 국정 운영에 걸맞은 역할을 똑 떨어지게 잘해 주었는데, 그만한 인물을 다시 찾을 수 있겠느냐는 고민이었다. 이총리의 공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노대통령은 고 건 전 총리를 비교 대상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그때는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었다는 뉘앙스였다. 정의장이 지방선거 필패론을 앞세워 당의 입장을 전달했지만 대통령은 ‘지방선거’보다는 ‘국정 운영’에 더 마음이 쓰이는 듯했다.

하지만 두 시간의 면담 끝에 노대통령은 결국 총리 경질을 결심했다. 조마조마하던 정의장 입에서 안도의 숨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노대통령의 결심이 알려지자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의 노대통령 스타일로 보면 이번에도 총리를 유임시키는 쪽으로 버티고 나설 가능성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공직자들에 대한 문제가 불거졌을 때 노대통령은 이를 정치적·도덕적·법률적인 면으로 나눈 뒤, 법률적 문제가 있다면 즉각 인사 조처를 취했지만 정치적 공격을 당한다 싶으면 상당한 부담을 떠안으면서도 버티는 쪽을 선택하곤 했다.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이 국회 인사청문회 직후 야당으로부터 부적격자라는 비난을 받았을 때나, 윤광웅 국방부장관이 총기 난사 사고에 대한 책임론으로 사퇴 요구에 시달렸을 때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이번 3·1절 골프 파동 역시 아직은 법률적 하자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아 얼마든지 버티기가 가능한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대통령이 이처럼 신속하게 총리 사퇴를 받아들이고 나서자 정가에서는 그 배경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청와대 참모들은 주로 사태가 확산된 것을 이유로 꼽는다. 그냥 덮고 가기에는 그 사이 파장이 너무 커졌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의 한 참모는 “골프 한 것만 문제가 되었다면 아마 사퇴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해명 과정에서의 말 바꾸기 등 도덕적인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대통령도 사과만으로 넘어가기는 힘들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당-정-청 삼각관계의 붕괴를 우려한 것으로 해석하는 참모들도 많다. 노대통령이 강조하는 분권형 국정 운영은, 요컨대 대통령은 중·장기 과제에 집중하고, 일상적인 국정은 총리가 이끄는 내각과 당 의장이 진두 지휘하는 여당이 긴밀하게 협조해서 추진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여당에서 사퇴를 건의한 총리를 고집할 경우 삼각 편대의 협력 체제가 삐걱거리면서 여권 전체의 분열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집권 4년차를 맞는 노대통령으로서는 조기 레임덕을 몰고 올 수도 있는 여권 내부 시스템의 붕괴를 스스로 불러들일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정의장에게 진 빚 갚았다”

이처럼 청와대가 주로 사안의 성격과 시스템 붕괴에 대한 우려를 노대통령 결정의 주된 이유로 꼽는다면, 열린우리당측은 주로 지방선거를 위한 결단으로 본다. 염동연 사무총장은 “선거를 앞두고 당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라고 했고, 일부 당직자는 “이총리가 남아 있으면 지방선거는 해보나마나라는 당의 입장을 대통령이 받아들인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결정의 배경에는 정동영 의장에 대한 노대통령의 배려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이해찬 골프 파동이 터졌을 때 열린우리당은 크게 술렁거렸다. 그나마 새 지도부라도 꾸려 지지율을 만회해보려던 전략에 초반부터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하던 인사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그런 불만을 정의장은 ‘함구령’으로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총리 사퇴를 위한 총대를 멨다. 따라서 노대통령이 정의장의 건의를 묵살하고 이총리 유임을 선택했을 경우 정의장의 리더십은 박살이 날 게 뻔했다. 대권가도에 빨간불이 켜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를 의식한 듯 노대통령과 정의장의 회동 자리에 배석한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은 “총리가 유임될 경우 정의장이 견디지 못할 것이다”라는 얘기를 했고, 노대통령은 이를 경청했다. 노대통령의 결심 과정에 ‘정동영 변수’가 적잖이 영향을 끼쳤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총리 대신 정의장에게 힘을 실어준 이번 결정으로 노대통령과 정의장은 다시 한번 끈끈한 인연을 과시했다. 2002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 두 사람만 남아 완주했던 인연, 2002년 대선 과정에서 대통령 후보와 핵심 운동원으로 함께 대선 승리를 일궈낸 인연, 2004년 총선에서 탄핵 상태의 대통령과 그를 구하기 위해 앞장 선 소수 여당 의장으로서의 인연, 그리고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 관계를 정상 궤도에 올리고자 고군분투했던 대통령과 통일부장관으로서의 인연에 이어 다섯 번째다. 친노 진영에 속하는 열린우리당의 한 초선 의원은 “지금까지 주로 노대통령이 정동영 의장의 도움을 받는 쪽이었다면, 이번에는 노대통령이 그 빚을 갚은 셈이다”라고 풀이했다. 이를 입증하듯 다음날 언론은 일제히 “정의장에게 힘이 실렸다”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정치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당장은 정의장이 도움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오히려 노대통령에게 유리한 선택일 수 있다는 얘기다. 한 여론 전문가는 “이해찬 걸림돌을 치워줌으로써 노대통령은 지방선거 부담에서 한결 자유로워졌다. 지방선거 이후 행보에서도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하지만 정동영 의장은 이제 모든 책임을 혼자서 지고 가게 생겼다”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노대통령이 총리 경질을 결심하고 난 다음날 만난 정동영 의장은 어깨가 더 무겁다고 했다. 그는 “이제는 외통수다. 장관직에서 물러나서면서부터도 그랬지만, 이제는 더더욱 5·31에 올인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최대 위기이자 절호의 기회 앞에 선 정동영

그러지 않아도 5·31 지방선거는 정의장에게 대권 가도의 최대 승부처로 여겨졌다. 열린우리당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경우 당 안팎에서 정동영 책임론이 거세게 몰아칠 게 뻔하고, 이 경우 가뜩이나 저조한 지지율에 시달리고 있는 정의장으로서는 당내 경선을 치러낼 동력조차 잃게 되기 때문이다. 당내 호적수인 김근태계의 반격과 함께, 당 밖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고 건 대안론에 부닥칠 가능성이 높다. 그런 마당에 노대통령마저 지방선거 책임론에서 슬쩍 비껴나게 생겼으니, 정의장 처지에서는 이래저래 5·31 선거에 사생결단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이 지방선거에서 선전할 경우 상황은 1백80도 달라진다. ‘어렵다’는 평이 압도적이었던 만큼 정의장에게 돌아올 반대급부도 훨씬 더 커진다. 따라서 5·31 지방선거는 정의장에게 최대의 위기이자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현재 정의장측이 설정하고 있는 ‘선전’의 기준은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에서 최소한 한 석을 차지하는 것이다. 만약 세 곳 가운데 두 곳 이상을 차지한다면 이는 언론으로부터도 ‘승리’로 공인받을 만한 쾌거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 정의장은 수도권 선거에 총력을 기울일 작정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무엇보다 경쟁력 있는 인물을 영입하는 것으로 잡고 있다. 이를 위해 정의장은 그동안 ‘강-대-석 트리오(서울 강금실-경기 진대제-인천 강동석)’에 공을 들였는데, 강금실-진대제 카드는 성사 가능성이 높은 반면, 강동석 카드는 ‘건강’ 문제로 무산된 것으로 알려진다.  인천의 경우 새 후보 찾기에 들어갔다는 얘기다.

빅 스타들의 영입이 결정되면 여권은 순차적인 입당식을 통해 선거 분위기를 한껏 띄우는 한편, 최연희 의원 성추행 파문·한나라당 내 공천 잡음 따위 야당의 취약점을 집중 공격하는 방식으로 전세를 반전시키겠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이와 함께 정동영 의장이 내심 기대하고 있는 대목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후임 총리와 관련되어서다. 정의장은 노대통령과의 면담 에서 차기 총리는 ‘경제 총리’였으면 좋겠다는 뜻을 비쳤다. 민심 이반의 주된 원인이 대통령이 경제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만큼, 대통령이 경제를 직접 챙기거나 아니면 차기 총리를 경제 전문가로 세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미였다. 여기에는 이른바 ‘정치 총리’가 지명될 경우 청문회 과정에서 또 다시 정국이 요동치고, 이것이 여당의 선거전에 부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것을 우려하는 원모심려(遠謀深慮)가 담겨 있기도 하다.

차기 총리와 관련한 이런 정의장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열린우리당이 지방선거에서 대역전극에 성공할 경우, 노무현 대통령과 정동영 의장은 대선·총선에 이어 지방선거까지 승리를 공유하는 진기록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두 사람은 적잖은 상처를 입게 되고 여권 역시 급속도로 정계 개편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공산이 크다. 정가에는 이미 열린우리당 패배를 근간으로 한 각종 정계 개편 시나리오가 나도는 상황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지방선거 전에 차기 총리를 발표할 것으로 알려진 노대통령의 선택이 주목되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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