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가 ‘마술 피리’ 불고 있다
  • 차형석 기자 (cha@sisapress.com)
  • 승인 2006.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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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공연 에 인파 몰려…‘진짜 음악’이 성공 비결
 
저녁마다 EBS(한국교육방송공사) 도곡동 사옥은 마술에 걸린다. 지난 3월21일 저녁 7시, 20, 30대 젊은이들이 서울 강남구 도곡동 EBS 사옥 1층을 가득 메웠다. 누군가 사람을 모으는 마술피리를 분 것처럼. 1층에 마련된 공연장에 온 사람들이다. 이날 무대에 오른 이는 록그룹 트랜스픽션이었다. 공연 중반, 관객들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서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스페이스 공감>은 EBS의 마술피리이다. EBS는 도곡동 사옥 1층에 1백50여 석 소극장을 마련하고, 주 5회 공연(주말 제외·무료)을 한다. 그 공연은 주 2회 방송(토·일 밤 10시)으로 나간다. 2004년 4월1일 첫 공연을 시작한 이래 근 2년 동안 5백8회째 공연을 했고, 연인원 8만1천7백여 명이 공연장을 찾았다(3월15일 현재).

그동안 무대에 선 뮤지션만 연인원 3천48명(세션 포함). 거쳐간 이들이 쟁쟁하다. 신영옥, 유키 구라모토, 김창완, 윤도현밴드, 한 대수, 허클베리핀, 황병기, 안숙선, 이루마 등등. 지난 2005년 10월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손봉숙 의원(민주당)과 강혜숙 의원(열린우리당) 등이 “공연 문화의 대중화를 일구어냈다”라면서 예산을 점진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을 정도였으니, 프로그램 질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은 셈이다. 하긴 관객 처지에서 이들의 공연을 몇 미터 앞에서, 그것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거의 축복에 가깝다(소극장 맨 뒷자리도 세종문화회관 가장 앞에 있는 좌석보다 가깝다).

 
<스페이스 공감>은 전 ‘고석만 체제’의 작품이다. 2004년 고석만 전 사장(현 MBC 특임이사)은 저녁마다 공연을 하는 ‘스페이스 공감’을 10대 기획 사업으로 추진했다. 처음에는 내부 제작진뿐만 아니라 외부 전문가들도 반신반의했다. 주 5회 무료 공연을 상설로 선례가 없었다. 고민은 세 가지였다. ‘매일 공연을 어디서 하지? 라이브 공연과 방송을 연계했을 때 상업성(시청률)은? 매일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 뮤지션 층이 두꺼운가?’

음악·공연 전문가인 김준성 PD, 백경석 PD, 김형준 PD 등 현 제작진을 중심으로 태스크포스(TF)팀이 꾸려졌다. 공연장 문제가 가장 먼저 해결되었다. 도곡동 사옥 1층에 있던 소강당을 공연을 할 수 있는 소극장으로 개조했다. 음향학 박사, 음악 엔지니어, 건축가 들이 투입되었다.

음악 방송의 방향과 대안 제시한 ‘실험 무대’

하드웨어는 일단 완성되었다. 다음은 소프트웨어였다. 세 PD는 벤치마킹할 모델을 찾았다. 미국·유럽·일본에 체인 형태로 있는 재즈 전문 공연장 ‘블루노트’ 같은 참고 사례를 모았다. 세 사람은 틈만 나면 다른 공연장을 찾았다. 어떤 뮤지션을 세울지, 어떤 방식으로 공연을 할지 고민했다. 그러고 나서 공연 원칙을 세웠다. “그래, 처음에는 재즈부터 시작하자. 지명도보다는 실력이다. MR(Music Recorded·녹음된 반주 음악)은 안 한다. 공연은 무조건 라이브다.”

윤희정, 이정식 밴드 등 쟁쟁한 재즈 뮤지션을 중심으로 공연을 시작하자 팬들과 예술인들 사이에 서서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방송 출연료보다 조금 더 주는 선에서 공연료를 받는 데도, 예술가들은 선뜻 섭외에 응했다. 한 시간 반 넘게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칠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제 일본 뮤지션들 사이에서는 ‘한국에 가면 이런 공연이 있다’고 소문이 나 내한 공연을 하게 될 경우에 미리 연락이 올 정도가 되었다.

 
음악 장르도 재즈에서 록, 월드 뮤직, 클래식, 국악 등으로 넓혀갔다.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공연 신청을 받고, 추첨을 하는데 윤도현밴드가 공연할 때는 8천여 명(경쟁률 52:1)이 신청할 정도로 팬들이 몰렸다. 인터넷 순위 사이트 랭키닷컴에 따르면, 예술 센터 부문에서 ‘스페이스 공감’이 예술의전당 다음으로 클릭 수가 많다.

기획 공연 시리즈도 다양화했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참여한 ‘20세기의 클래식’,  한대수·김창완·최이철·김수철·이정선·주찬권 등이 무대에 오른 ‘우리가 그들을 거장이라고 부르는 이유’ 연속 공연, 노찾사·연영석 등 민중가요를 집중 조명한 ‘꽃보다 아름다운 노래’ 시리즈 등이 그동안 주목을 받았다.

백경석 PD는 “한대수·최이철 씨가 단독 공연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보여준 거의 최초의 방송이었다”라고 말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한 획을 그은 이들은 릴레이 공연에서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백PD는 리허설 전에 ‘공연 전에는 내 안에 귀신이 나온다. 리허설에서 내가 화를 내도 용서해달라’고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 연습에 매진했던 한대수씨의 공연을 잊지 못한다.  

스페이스 공감은 한국에서는 드문 ‘음악적 실험’이다. 대중들은 좋은 공연에 목마르면서도 막상 사회자 없이 라이브 공연 프로그램을 지켜보는 데는 인색하다. 인기 댄스 가수 위주로, 그것도 여러 팀이 나오고, 재담을 잘 하는 사회자가 나오는 ‘립싱크’ 프로그램이 반복되는 것도 시청률이라는 함정 때문이다. 스페이스 공감 제작진에게도 시청률은 아쉬운 대목이다. 백경석 PD는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시청률과 긴장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 방송의 방향을 제시하고, 대안을 마련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제작진은 4월 초 2주년 기념 공연으로 언플러그드 공연을 준비했다. 블랙홀, 부활, 언니네이발관, 서울전자음악단, 김목경 등이 출연한다. 관람 신청은 홈페이지(www.ebs-space.co.kr)에서 하면 된다. 추첨 방식이기 때문에 공연을 보려면 ‘운 7, 노력 3’이 작용하는 게 아쉽지만, 한 번쯤 클릭해볼 만하다. 홈페이지에 떠 있는 문구처럼, ‘그곳에 가면 진짜 음악이 있기에’.  

인터뷰에 응한 후, 김준성 PD는 재즈 뮤지션 신관웅씨의 공연이 열리는 예술의전당으로  향했다. 그는 10년 넘게 음악·공연 프로그램을 담당한 베테랑이다. EBS 인근 매봉역 사거리를 함께 걷던 김PD는 전봇대를 유심히 보았다. “어, 여기에 이런 게 생겼네.” 드럼 레슨을 한다는, 과외 공고처럼 뜯어갈 수 있게 만든 전단이 붙어 있었다. 김PD는 전화번호가 적힌 조각을 뜯어내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대학 시절 밴드를 했던 백경석 PD도 옆에서 거들었다. “한번 해봐.” 역시 그 방송에 그 PD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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