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 “일본 넘어서리라”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6.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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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로야구의 ‘정수리’에서 거침없이 질주하는이승엽의 성공 비결은?
 
2003년 11월 이승엽은 거침이 없었다. 그의 홈런포 행진은 결코 깨질 것 같지 않던 왕정치 감독의 아시아 최다 홈런(55호) 기록마저 갈아치웠다. 대한민국 대표 타자의 미국 메이저 리그 입성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이승엽의 꿈이었다.
시즌 후 이승엽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메이저 리그 구단들은 야구의 변방 한국에서 온 홈런 타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한인이 많은 로스앤젤레스에 연고를 둔 다저스만이 이승엽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연봉 30만 달러(약 2억9천만 원). 한마디로 자존심이 상하는 액수였다. 2003년 삼성에서 이승엽은 6억3천만원을 받았다. 창피한 나머지 언론에는 다저스가 100만 달러(약 9억6천만 원)를 제시했다고 흘렸다.

이승엽은 눈물을 훔치며 일본 롯데 마린스로 갔다. 일본에서 우뚝 선 다음에 미국 메이저 리그로 가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야구계 인사들은 일본은 무덤이라고, 이승엽은 덫에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 야구인들은 선동열·이종범·정민태·정민철 같은 선배들의 실패를 뇌리에서 지울 수 없었다. 특히 돌풍을 일으키던 이종범의 발을 묶었던 가와지리의 사구(死球)를 잊을 수 없었다.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일본의 ‘현미경 야구’에 이승엽은 고통을 당했다. 투수들은 몸에 맞든 말든 몸 쪽 떨어지는 변화구만 던졌다. 급기야 2004년 5월 이승엽은 2군으로 추락하는 충격까지 맛보았다. 겨우 1년 전 56홈런을 때려낸 ‘아시아 거포’의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2004년 이승엽은 2할4푼에 홈런 14개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나마 2005년에는 상황이 나아졌다. 홈런 30개를 만들어내며 팀을 재팬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의 국민 타자는 왼손 투수가 나올 때는 벤치를 지키는 반쪽짜리 선수로 전락했다. 홈런을 치고 나서도 왼손 투수가 나오면 빠져야 했다.

시즌을 마친 후 이승엽은 일본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옮겼다. 지난 시즌 2억 엔(약 16억2천만 원)을 받았던 이승엽은 1억6천만 엔(약 13억원)을 받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돈보다 반쪽 타자를 벗어나는 게 중요했다. 1루수 수비도 하고 싶었다.

그런 이승엽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기막힌 반전을 이루었다. WBC에서 이승엽은 중국·일본·멕시코·미국을 격침시키는 데 결정적인 홈런을 쳐 ‘반쪽 선수’의 설움을 날려버렸다. 메이저 리그 진출을 꿈꾸는 이승엽으로서는 미국에서 만점짜리 면접시험을 치른 셈이었다. WBC에 나서는 것 자체가 사실 이승엽에게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팀을 옮긴 외국인 선수로 감독 눈에 드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이승엽의 홈런은 기술에서 나온다”

WBC에 이어 일본 정규 리그에서도 이승엽의 방망이는 불을 뿜고 있다. 개막전 첫 타석에서 2타점 결승타. 이어서 홈런을 거푸 쏘아올리고 있다. 지난 4월6일에도 결정적인 안타를 때리며 여섯 경기 연속 안타를 이어갔다. 이제 이승엽이 일본 홈런왕에 등극하리라는 전망을 내놓는 전문가도 여럿 있다.

언론은 이승엽이 몸을 만들고 힘을 키웠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일본의 스포츠신문인 <스포츠닛폰>에서는 “힘만 따지면 마쓰이(뉴욕 양키스)보다 낫다”라며 이승엽에게 베팅볼을 던져준 기타노 아키히토의 말을 인용했다. “오랜만에 마쓰이를 상대로 던졌던 시절이 생각났다. 커다랗게 솟아오른 타구가 스탠드에 들어가 버린다. 힘만 놓고 본다면 마쓰이보다 위일지도….” 일본 팬들과 언론은 이승엽이 요미우리의 전설 히데키 마쓰이(뉴욕 양키스)를 넘어서는 것을 원치 않는 듯하다. 일본 언론은 히데키 마쓰이·스즈키 이치로와 비교하는 것은 피하면서 이승엽의 힘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일본 언론의 뒤를 이어 한국 언론도 이승엽의 힘과 먹을거리와 관련한 일거수일투족을 쏟아내고 있다. ‘이승엽이 2년 전부터 고향 대구의 세진헬스클럽에 다녔다. 몸무게를 8㎏나 늘렸고, 팔뚝 둘레는 16.5인치, 허벅지 둘레는 28인치로 커졌다. 이승엽이 하루에 먹는 달걀은 대략 20개나 되고 장어탕을 즐긴다. 이승엽이 쓰는 방망이 무게에 변화를 주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승엽의 홈런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삼성의 심정수가 달걀을 더 많이 먹고 힘도 더 좋다. 최희섭·김동주·문희성 등 힘이 장사인 타자는 더 있다. WBC에서 보인 이승엽과 최희섭의 타격에는 차이가 많이 났다.

야구 전문가들은 이승엽 질주의 원동력이 타격 기술에서 비롯한 것으로 분석했다. WBC에서 한국팀을 이끈 김인식 감독은 “이승엽의 홈런은 뛰어난 기술에서 나온다”라고 말했다. 2호 홈런을 친 지난 4월2일 이승엽은 “일본에서는 스윙 폭이 커서는 절대 잘할 수 없다”라고 자신의 변신을 요약했다.

 
일본 진출 첫 시즌에서 쓴맛을 본 이승엽은 김성근 코치의 지도로 스윙 자세를 간결하게 만들었다. 일본 투수들의 변화구를 공략하기 위해 백스윙을 줄였다. 다른 선수가 귀가한 후에 이승엽은 2천 번 이상 방망이질을 해서 지금의 자세를 만들었다.
이승엽의 스윙 자세는 미국에서도 찬사를 받았다. 미국 스포츠 전문지 ESPN은 이승엽의 스윙이 메이저 리그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를 연상케 한다고 보도했다. 야구 전문 기자들은 이승엽의 폼에 스위트(sweet)라는 형용사를 달았다. 간결하고 힘이 넘치는 스윙 자세에 대한 최상급 수식어다.

자세가 안정되자 투수를 읽는 눈도 한층 밝아졌다. WBC 일본전에서 이승엽이 때린 홈런은 이를 잘 보여준다. 왼손 투수 이시이 히로토시가 머리로 향하는 위협구를 던졌다. 다음 공은 바깥쪽 변화구. 하지만 이승엽은 이를 놓치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러 홈런을 만들었다.

이승엽은 일본 진출 첫해, 투수의 투구 유형을 읽지 못해 힘없이 물러나곤 했다. 일본에서 지난 두 시즌 동안 2백17경기에 출전하면서 삼진 아웃을 1백67개나 당했다. 이에 비해 사사구는 79개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올 시즌은 다르다. 올 시즌 여섯 경기에서 이승엽이 얻은 볼 넷은 모두 7개. 리그 1위다. 삼진은 3개뿐이다. 스윙이 간결해지다 보니 변화구 대처가 수월해졌다. 상대 투수의 결정구를 걷어내고 있다. 떨어지는 변화구에 어이없이 방망이를 돌리는 모습은 올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승엽은 “센트럴 리그 투수들은 대부분 처음 상대하기 때문에 지금은 공 보고 공치기다. 스트라이크는 치고, 볼은 손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승엽은 끝까지 공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2년 전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WBC를 통해 얻은 자신감이 홈런을 만들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봉연 극동대 교수는 “이승엽의 가장 달라진 면은 자신있게 타석에 나선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승엽은 타석에서 여유를 보이고 있다. 이런 점은 상대 투수를 불안하게 만든다.
일본 프로야구가 개막된 3월31일 일본과 한국의 스포츠 신문 1면 머릿기사는 이승엽 차지였다. 일본 야구의 상징, 국민의 구단, 그 거인군의 4번 타자 이승엽에게 쏟아지는 당연한 관심일 수도 있다. 이승엽은 지난해 5월 경기 다섯 연속 홈런을 날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1면에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이승엽은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면 신이 나는 스타일이다. 이승엽은 “관중 열기 때문에 타구가 더 날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스승인 박흥식 삼성 코치는 “승엽이는 자신을 믿는다는 분위기만 만들어주면 더 잘한다. 요미우리에서 하라 감독이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같아 다행이다”라며 흡족해했다. 요미우리 와타나베 구단주는 “이승엽이 이번 리그에서 홈런 50개는 가능할 것이다”라며 이례적인 신뢰를 보냈다.

이승엽은 완벽한 출발을 했다. 하지만 고질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바로 왼손 투수와 몸 쪽 공이다. 이승엽은 올 시즌 네 경기에서 왼손 투수 세 명을 만나 8타수 1안타(타율 0.125)에 그치고 있다. 이승엽은 “몸 쪽으로 들어오는 역회전볼이 조금 문제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요미우리는 주전 선수 중 여섯 명이 좌타자라는 것도 불리한 점이다. 그래서 요미우리전에는 왼손 투수들이 집중 투입된다.
이승엽에게는 왼손 투수에 약하다는 심리적인 압박을 떨쳐버려야 한다는 주문이 따른다. WBC 이후 상황이 호전되고 있기는 하다. 이승엽은 지난해 메이저 리그 최다승(22승)을 올린 최고의 왼손 투수 돈트렐 윌리스를 상대로 결승 홈런을 날렸기 때문이다. 윌리스는 지난해 좌타자에게 홈런을 한 개밖에 허용하지 않은 ‘좌타자 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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