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안에 든 현대차 사정권 든 정·관계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6.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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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에 연루된 정·관계 인사와 관련해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올 때까지 정몽구 회장 부자에 대한 검찰의 압박은 계속될 전망이어서 정회장의 행로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은, 그를 향해 정조준한 듯한 검찰의 칼날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현대·기아차그룹 비자금 수사가 꼭지점을 향해 치달으면서 정회장의 앞날이 주목되고 있다. 검찰은 “정몽구·정의선 부자 가운데 누구를 먼저 소환할지는 수사가 진행되는 상황에 따라 결정하겠다”라고 밝힌 상태다.

“특수 수사 검사들 사이에는 축구공을 너무 앞질러 차지 말라는 말이 있다. 뺏기면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이 특수 수사다.”
대검찰청 채동욱 수사기획관은 4월6일 오후 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날 채기획관은 “현대차 비자금의 사용처와 관련해 정몽구·정의선 부자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라며 두 사람이 소환될 가능성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신중하게 하는 수사’가 이 정도라면 검찰은 이미 두 사람이 비자금을 조성하고 사용한 일에 구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단서를 확보했다는 뜻이 된다. 검찰이 현대차 계열사인 글로비스에서 압수한 비자금 입출금 내역이 적힌 장부가 새삼 주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검찰은 “비자금이 글로비스에서 현대차 내부로 어떻게 흘러갔는지 경로를 조사 중에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비자금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오너 일가밖에 없는 것 아니냐”라는 물음에는 “조사 중에 있다”라며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검찰은 현대차 비자금 수사를 ‘구멍가게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수사하기에는 구멍가게가 편하다. 구멍가게는 한 사람이 자금을 조성하고 보관, 집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차는 이 세 부분이 나뉘어 있다. 글로비스에서 압수한 장부는 비자금을 보관·관리하는 입장에서 적어 놓았다”라는 것이다. 달리 보면 이 세 부분을 종합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정회장 부자일 수밖에 없다는 암시다.

흥미로운 것은 정회장 부자에 대한 소환 가능성이 김재록씨의 이름과 함께 거론되었다는 점이다. 채기획관은 “김재록씨로부터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김씨가 수사에 잘 협조하고 있다”라고 했다. 평소 ‘정의선 가정교사’로 불렸던 김씨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는 것은 현대차 비자금을 조성하고 사용하는 것과 관련해 김씨가 구체적으로 털어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추론할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다. 하나는 김씨가 현대차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구체적인 진술을 했을 가능성이다. 금융·구조조정 전문가인 김씨는 정몽구 회장이 후계 구도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는지 밑그림을 그려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검찰은 “심증이 있다”라고 밝혀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정몽구 1인 지배 체제 종식될 듯”

이와 관련해서 지난 4일 검찰이 윈앤윈21 등 현대차와 관련 있는 기업 구조조정 전문회사 다섯 곳을 압수수색한 것이 눈길을 끈다. 검찰은 “조사가 잘 되었다”라면서 체포영장까지 발부받아 체포했던 이들 회사의 대주주 세 명을 풀어주었다. 검찰은 이들 회사와 김재록씨의 관련성을 조사 중이다.

다른 하나는 김씨가 비자금을 사용하는 데 연루되었을 가능성이다. 검찰 주변에서는 수사 초기부터 김씨가 현대차로부터 컨설팅 명목으로 큰돈을 받아 일부를 정·관계 로비 자금으로 썼다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검찰이 “현대차의 비자금 전달 방식이 통상적인 기업들과는 다른 것 같다”라고 밝힌 것과 맥이 닿는 부분이다.

검찰은 수사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채 기획관이 “수사가 잘되고 있다”라고 공언할 정도다. 아홉 명에 달하는 수사 검사 중에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수사에 전념하는 검사가 여럿일 정도로 의욕도 넘친다. 검찰이 자신감을 보이는 배경에는 지난 3월26일 현대차를 압수수색한 결과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검찰이 자료를 죄다 틀어쥐고 있으니 관련자들이 발뺌에 나설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당했다. 모든 것이 털렸다”라고 말했다.

검찰 소환을 앞두고 있는 정회장 부자에게 쏠린 의혹은 크게 두 가지다. 비자금을 조성하고 사용하는 데 관여한 의혹과, 글로비스 등 계열사를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 법을 어긴 부분이 있다는 의혹이다. 배임과 횡령,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검찰은 이 두 부분과 관련해 정회장 부자를 몰아칠 물증과 진술을 확보한 상태다.

 
검찰은 수사가 정회장 부자를 정면으로 겨눈 데 대해 “수사 과정에서 수사팀 입장에서도 예상치 못한 기업 운영 과정과 관련한 비리가 포착되었다. 고심을 하다가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 회사를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것은 법에 맞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단서가 포착되었기 때문에 수사를 진행한 것이지 애초부터 목표를 정해 놓고 수사를 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회장 귀국을 전후해 현대차 내부에서는 다양한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이 느닷없이 외국으로 나가면서부터 검찰 수사가 급류를 타기 시작했기 때문에 “누가 출국을 조언했느냐”를 놓고 설왕설래했다. 사태가 마무리된 이후 내부적으로 만만치 않은 문책인사 후폭풍이 불 것임을 예상케 하는 대목이다.

한 관계자는 “정회장은 삼성의 이학수 부회장과 같은 확고한 2인자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사태에서도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손가락만 잘라도 될 일을 오판해 팔다리까지 잘라도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고 간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현대측에서 내놓으리라고 예상되는, 이른바 수습 방안과 관련해서도 정리되지 않은 채 여러 버전이 나돌고 있다. ‘정몽구 회장의 사재 출연’ ‘정의선 기아차 사장의 비상장 계열사 지분 정리 후 사회 헌납’ ‘사회공헌 활동 강화’ 따위 안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번 사태를 ‘가신의 난’이라는 관점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사건의 발단이 된 제보가 아주 구체적으로 정회장 부자를 겨냥해 이루어졌고, 사태가 터진 이후에도 ‘측근’이나 전문 경영인 가운데 몸을 던져서 해결에 나서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상황을 즐기는 듯한 흐름마저 엿보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계열사별로 경영 자율성을 확대하는 등 향후 그룹 경영 행태에도 큰 변화가 올 것으로 전망된다. ‘정몽구 1인 지배 체제’가 종식되는 대신 체계를 가다듬는 조처가 잇달아 나올 것으로 예측된다.

호남에 기반 둔 정치인 등 이름 오르내려

검찰은 늦어도 5월 초까지는 현대차 비자금 수사를 끝낼 계획이다. 환율과 유가가 치솟는 가운데 수사가 경제에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여론이 있고, 지방선거가 코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채기획관은 기자들에게 “수사는 속도를 낼 테니 취재는 천천히 하라”라고 주문했다.

현재 검찰은 정회장 부자를 동시에 처벌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전례를 고려하지 않고 이번 사건에 맞는 가장 합당한 결론을 내리겠다”라는 것이 정확한 언급이다. 과거에는 경영 공백 등을 고려해 한 사람만 처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검찰 주변에서는 현실적으로 두 사람을 모두 처벌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본다. 아무래도 경영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회장의 귀국을 앞두고 현대차측에서 청와대와 검찰을 상대로 분주한 움직임을 보인 것을 들어 어느 정도 사전 조율이 이루어지지 않았겠느냐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전반적인 외부 흐름이 좋지 않아 속단하기는 이르다. 올 들어 이용훈 대법원장과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잇달아 “화이트칼라 범죄·경제 범죄를 엄단하겠다”라고 공언해 온 터에 이번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천장관은 지난 3월28일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경제인들이) 법을 위반했다면 확실하게 불이익을 주어야 장기적으로 경제가 발전한다”라고 말했다.

 
시민단체의 움직임도 변수다. 참여연대는 지난 6일 ‘38개 재벌 총수 일가의 주식 거래에 대한 보고서’를 내면서 ‘정몽구·정의선 부자를 배임 혐의로 형사 고발하겠다’라고 밝혔다. 회사의 본질적 업무와 관련된 자동차 물류 회사인 글로비스를 정회장 부자의 개인 회사로 만들어 편법적으로 경영권을 물려주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검찰 안팎의 흐름을 종합해보면 정회장 부자 가운데 한 명이 처벌받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또 부자를 상대로 한 검찰의 압박을 피해가기 위해 현대차그룹측에서는 정·관계 로비와 관련한 내용을 일부라도 검찰에 털어놓는 수순으로 타협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대국민 사과나 사회 공헌과 관련한 여러 조처들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 비자금 사건과 ‘따로 또 같이’인 김재록 로비 의혹 사건에 대해서도 검찰은 철저하게 수사할 계획이다. 효율적인 수사를 위해 집중하는 정도가 다를 뿐 김재록 로비 의혹 사건은 여전히 가지가 아닌 나무라는 것이다. 채기획관은 “김재록 사건은 없어지지 않았다. 오른쪽 집에 불이 나고 왼쪽 집에도 불이 났는데 오른쪽 불이 크고 우리 집으로 옮겨 붙으려고 하니까 먼저 끄는 중이다. 오른쪽 불을 다 끄면 당연히 왼쪽 불을 끄는 데 집중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정몽구 회장이 귀국하면서 현대차 비자금 수사, 김재록 로비 의혹 사건 수사의 불똥이 정·관계로 튀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었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고 보아야 한다. 현대차의 약한 고리를 속속들이 파악한 검찰은 로비에 연루된 정·관계 인사와 관련한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올 때까지 정회장 부자에 대한 압박을 멈추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모든 자료를 검찰에 압수당해 치부가 고스란히 노출된 정회장 부자 또한 다른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정치권에서는 벌써 호남에 기반을 둔 정치인과 전·현직 경제 관료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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