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생 수행 평가 실시
  • 설호정 언론인 ()
  • 승인 2000.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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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개혁인가

딸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지난해에 가정 시간에 파자마를 만든다고 했다. 손재주 없이 태어난 아이여서 고민이 많겠구나 했을 뿐 내가 나 서서 도와야 할 일인 줄은 몰랐다. 어느날 우리집 아이와 같은 반의 한 어머니가 전화를 해서 다른 얘기를 하다가 자기는 그 바느질 숙제를 해주기 싫어서 동네 수선집에 갖다 맡겼다고 했다. 그러고 덧붙이기를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한가하게 손 박음질로 옷을 만들게 해서 그걸로 내신에 영향을 받게 하느냐고 그럴 바에야 재봉틀 돌리는 거나 가르치지 하기야 학교에 그 많은 애들 실습시킬 재봉틀이 있기나 하겠느냐고 똑 떨어지게 개탄하고 전화를 끊었다.

당연히 어미들의 숙제였던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학교 갔다 와서 서둘러 저녁 먹고  다시 학원으로 행차해야 하는 아이를 붙들고 딴소리 없이 파자마 숙제는 이 엄마가 좀 돕겠다고 했다. 이 아이는 태어나 처음 당하는 일이라 어마두지에 너무 잘하면 안 돼. 선생님이 엄마가 해준 건 금방 안댔어하고 당부를 잊지 않았다.

철야. 들키지 않고 무사 통과. 평점 A. 중간 고사 성적으로 대치. 자동으로 내신에 반영

‘어미들의 숙제’만 늘어날 판
이런 프로세스는 올해 중학에 들어간 아이에게는 더 엄혹하게 적용되게 되었다. 이른바 수행 평가의 비중이 무거워짐과 함께 그것이 반영된 내신이라는 꼬리표가 대학 입시에까지 따라 붙는다고 들었다. 정보가 입수된 마당이니 모르쇠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간이 남아 빈둥거릴지언정 아이들 숙제 챙기는 데는 익숙치 않은 내가 날마다 숙제 타령을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뿐일까? 교사가 어미의 손길을 눈 감아 줄 수 있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가 어딜까를 가늠하며 올 방학에도 아이의 숙제에 깊이 개입했다.

이를테면 아이의 궁리가 무르익기도 전에 여차하면 대신해 주고 말겠다는 각오로 아이를 틀어쥐고 노골적으로 지도 편달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늘 아이에게 변명처럼 늘어놓기를 이런 숙제는 처음이니까 엄마도 의견을 내는 거지만 다음에는 니가 알아서 하는 거야 했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미 속을 뻔히 들여다보고 있겠지만 능청맞게 알았어했다. 창의성 따위가 싹트기를 기다리기에는 과제는 너무 크고 많으나 점수는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

얼마 전에 내년부터는 중학교에서 시험을 없애고 수행 평가만을 할 예정이라고 교육부의 책임 있는 분이 발표했다. 그러나 혼자 버려두어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과제가 열 과목이 넘는 교과목 전체에 걸쳐서 떨어지고 그러고도 교과서 공부는 또 그것대로 해야 한다면 이제 막 그려 보인 나와 내 아이의 가긍한 정경이 확대될 뿐 무슨 막중한 교육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을지 의심된다. 제 자식이라면 인사불성이 되는 대한의 어머니들이 좌정하고 있는 집안으로 과제물을 내던져 주고 무슨 수로 평가의 공정성을 장담하겠냐는 말이다.

게다가 이 각박한 산업 사회의 어미 중에는 아이의 일상적인 과제를 챙길 수 없는 사람도 많고 많다. 또 부모가 아예 없는 아이는 어째야 하나? 교사들로 말하더라도 그 대상이 수백명에 이르고서야 무슨 재주로 내용 있는 수행 과제를 낼 수 있을까? 종당에는 논술이 그렇듯이 대한민국 교육의 해결사인 학원이 아이들 수행 평가용 지도를 수행하게 됨으로써 그 거룩한 명분이 한순간에 박제화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하기야 터놓고 말해 우리 교육 교육이 어디 아이들을 위해서 있나? 선의적인 예외를 셈에 넣어 유보적으로 말하더라도 대한민국의 교육은 더러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수도 있으나 대체로는 교육 산업을 위해 또 그 종사자들을 위해 문제를 확대 재생산하는 구조이다.

교육 제도를 개비할 때에 유의해야 하는 것은 그 시행착오가 용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교육 행정가들의 수많은 시행 착오에 자기 아이를 희생으로 바치지 않으려는 어미들의 눈물겨운 임전 태세가 어떤 훌륭한 새 제도도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문턱이 되고 있음도 인정한다. 그러나 상고하건데 그 원인 제공의 죄는 무슨 사연 때문인지 교육 현장을 직시하기를 회피하는 교육 정책 입안자들에게 있다.

수행 평가에는 만가지 득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나 같은 야비한 어미들의 입김이 아이의 성적을 계량하는 바늘을 움직이게 하는 일부터 피해 놓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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