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제사 혁신기
  • 설호정 /언론인 ()
  • 승인 2000.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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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보다 정성이 중요하다

알다시피 ‘제사 스트레스’라는 것이 남의 집 며느리 된 여자들 사이에 어제 오늘 이어온 것은 아니다. 근자에 들어 솔직하게 똘똘한 여자들에 의해 대답하게 ‘문제’로 떠올랐을 뿐이다.

  나도 남의 집 며느리 된 사람이다. 그것도도 큰 며느리, 그러나 시어머니는 일하는 내처지를 헤아려 웬만한 의무는 탕감해 주었다. 나는 나대로 그 보답을 철저히 금품으로 환원해 치르려 했다. 호혜주의 원책이랄까는 고부 사이에도 유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이를테면 제사의 경우에 나물은 반드시 내가 주무르도록 남겨 두었다. 장차 이 제사를 이어가야 할 사람이 바로 ‘너’라는 삿ㄹ을 확인시키는 상징적인 압력이었던 셈이다. 그쯤은 달게 받았다. 그러다가 결혼한 지 스무해쯤 만에 나도 전업 주부가 되었다. 지체없이 시집의 대소사가 내 면전에 떨어졌다.

  몇 번 해보니까 제사라는 것은 역시 스트레스였다. 제사가 다가오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어머니의 조수 노릇에 불과했지만 이런저런 일이 흔연히 해지지가 않았다.시아버지를 빼노고는 한번 뵙지도 못한 분들의 넋이 잡수실 요리에 바쳐야 하는 막중한 시간과 노동에 의미 부여가되지 않더라는 말이다.

  전통문화의 가족적 계승? 명분은 좋다지만 그대단한일의 실체라는 것이 하필 이면 피 한방울 튀지않은 며느리 집단의 노고로 감당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문제구나 싶었다. 그런점에서는 알고 보면 시어머니도 나와 동지였다. 가사 노동에 ‘돕는다’는 마음으로 참여하는 남자들은 제사를 두고는 발언권이없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지난 정초 차례때였다. 시어머니의 감독 아래 제수를 장만하고 있자니 흉중에 만감이 교차했다. 부엌일이 거의 마감된 섣달 그믐 오후 느지막이 도착한 동서들은 시어머니로부터 완곡 어법으로나마 질책을 받았고,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은 더욱 더 복잡해졌다. 가나긴 세월동서들이 집안 대소사에 내 몫까지 합쳐 수고한 일은 잊어버리고 그 당장에는나도 괘씸한 생악이없잖아 있었다. 사람은 은혜르모르는 짐승이라지 않나, 어쨌건 그리하여 올해 차례는 여느 해보다 우울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동서들ㄲ리의 마음은 뿔뿔이 갈라지고, ㅅ어머니는 또 그런 며느리들이 서운하여 ‘일년에 몇 번이라고’를 되뇌었다.

형식을 일신하니 마음도 가벼워져
 그러나 위기는 기회다! 이참에 차례를 포함한 제사를 혁파하자 싶었다. 혁파는 못해도 혁신은 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대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일에는 어디까지나 주도권이 어머니에게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대다수 시어머니의 아킬레스건은 ‘형제간에 의 상 한다’ 이다.  거기다 하나 더 보탰다. 제삿날 며느리들이 침울하면 와서 잡숫는 넋들이 즐겁겠느냐였다. 마지못해 지내는 것은 안 지내느니만 못하다에 까지 이르자 시어머니의 마음이 내 쪽으로 돌아앉았다.

  처음에는 ‘나 살아 있는 동안만 지내고’이더니 , 마침내 "그러면 어떻게 할까“로 바뀌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대안까지 내놓았다. 긴 이야기 짧게하면 절에서처럼 꽃과 떡과 과일만 놓고 집에서 정성껏 지내자였다 말은 내가 내었으나 슬거운 결단은 어머니가 내렸던 것이다.

  이제 막 시할아버지의 제사가 지나갔다 형식을 일신하니 마음도 가벼워져서 온 식구가 밝은 얼굴로 제상 앞에 마주앉았다. 넋이야 있는지 없는지 모를 일이나, 단 몇 십분 동안이나마 마음 한 구석 이지러짐 없이 사자(死者)를 추념 할 수 있어서 뜻 깊었다.

  우리 시어머니는 며느리 된 여자들의 억눌린 불만이 양념된 제수로 집안 귀신이 제대로 섬겨질 턱이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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