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철의 2시 탈출’은 금기 탈출
  • 성우제 기자 ()
  • 승인 2000.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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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말과 진행, 방송 ‘관행’ ‘상투성’ 깨뜨려 … 청취율은 가파르게 상승

1990년대 초반 ‘튀는 DJ’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마이카 시대가 열리면서 라디오가 다시금 힘을 얻어갈 무렵이었는데, 이숙영씨를 비롯한 몇몇 라디오 DJ들은 파격을 내세워 ‘튀기’를 자랑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튀는 DJ'라는 말도 20세기 유물이 되어 버렸다. 박 철 이라는 새로운 버전이 등장해 튀는 것의 내용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연기자 박 철씨가 라디오에 등장한 것은 지나해9월13일 SBS의 가을 개편 때였다. 브라운관을 누비며 시청자에게 주로 코믹한 연기를 보이던 그가, 라디오에 들어오면서 FM라디오의 오후2시대 판도가 달라졌다. “죽은 라디오를 내가 최고로 만들었다”라는 박씨의 호언은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라디오 청취율을 정기적으로 조사하지 않아. 그의 말이 수치로 증명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광고가 0개였다가 36개로 다 차버렸다’는 사실은, <박 철의 2시탈출>이 얼마나 가파르게 인기를 끌어올렸는가를 간적으로 증명한다.

 현재 오후 2시대의 최강자는 MBC <2시의 데이트 이문세입니다>이다. SBS<박 철의...>는 <2시의...>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올라가 있다. 수십년 전통과 가수 이문세씨의 빼어난 말솜씨가 결합한 프로그램을 불과 몇 개월 만에 따라잡은(박씨는 ‘우리가 1등이다’라고 주장한다) 힘은 어디에서 연유할까.

<박 철의...>가 지닌 가장 큰 힘은 방송의 ‘상식’ ‘상투성’ ‘관행’ 깨뜨리기이다. 그것은, 연출자 김삼일 PD도 꼽은 것처럼,박 철이라는 진행자의 독특한 캐릭터에서 나온다.SBS<이홍렬 쇼>,KBS<행복 채널> 들에서 박 철이라는 연기자가 지닌 이미지는 ‘웃음덩어리’이다. 그에게 웃음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박씨는 파격을 방자한 자연스런움을 선사한다.

 그는 방송 2시간 동안 앉아 있는 법이 없다. 앉으면 졸려서 방송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뿐 아니다. 그는 3평 남짓한 스튜디오를 휘젓고 돌아다니며 고랙래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춘다. 광고나 음악이 길어지면 서튜디오를 벗어나 담배를 피우고 스태프에게 끊임없이 장난을 건다.

 원고를 전하러 스튜디오에 들어온 작가가 진행자에게 붙잡혀 즉석에서 강제로 인터뷰를 당하는가 하면, 초대 손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아. 이제 방송해야죠.” 상투성 깨뜨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역시 말이다. 나이트클럽의 DJ가 구사하는 억양은 <박철의...>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때로는 욕설과 다름없는 비속어가 터져나오기도 한다. 이를테면 분위기에 취해 “오늘 날씨 참 더럽네요, 씨···.” “다 죽여버려!” “아쭈구리” 같은 말이 흘러나온다.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박씨의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생방송 재료이다. “자, 오늘은~ 시사저널의 성우제 기자가 놀러와서 스튜디오 바깥에 앉아 있습니다”라는 멘트는 얌전한 예에 속한다. 방송과 청취자 모두가 금기로 여겼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물을 후루룩 소리 나게 마시는가 하면, “이문세씨는 지금 화장실 가셨나요?”라며 경쟁 프로그램을 천연덕스럽게 거론한다. 청취자가 전화를 걸어와 “이런 얘기를 해도 정말 괜찮아요?”라고 되물을 정도이다.

 매주 금요일 청각 장애인을 위해 인터넷을 통해 동시에 생중계하는 시간은 더욱 파격적이다. 음악을 틀어놓고 진행자가 무엇을 하는지 생생히 보여주는데, 지난 3월17일에는 박씨가 SBS에 시위하기도 했다. ‘김삼일을 잔류시키자. 봄 개편 때 짜를려 한다. 투쟁’이라는 글을 화이트보드에 쓰고는,카메라를 향해서 “이런 개X 같은 개XXX들이 어디 있나”라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박 철의···>는 그동안 방송위원회로부터 서면경고를 네 차례 받았고, 사과 방송도 했다. 거침없는 말투 때문에 불쾌해 하는 이도 적지 않다.

서면경고 네 차례에 사과 방송도
 좌충우돌하며 ‘어디로 튈지 모르게’ 하는 이 프로그램은, 그러나 청취자를 불안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편안하게 한다. 방송 진행자나 청취자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단지 방송이라는 이유로 일부러 숨기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듣는 이들에게 금기를 깨는 통쾌함을 맛보게 하면서, ‘우리는 숨길 없이 말한다’라는 편안함을 안겨준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초대 손님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편안하게 이야기했다. 너무 편해서 방송이라는 사실을 까먹고 욕이 나올까 봐 겁이 날 정도였다.” 지난 3월22일 초대 손님으로 출연해 40분 동안 서서 이야기를 나눈 가수 임창정씨의 말이다.

 청취자의 처지에서 보면, 방송이라는 틀이 아니라 일상에서 말하듯 하는 진행자의 진행 방식에 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라디오를 듣는 청취자는 ‘나와 저 유명한 진행자는 허물없는 친구 사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마련인데, <박 철의···>는  그같은 심리를 충족시켜 준다.

 ‘제도권 방송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넘기도 했다’는 김삼일PD의 말처럼,<박 철의···>에 이런저런 허물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라디오 프로그램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방송의 관행과 상투성을 깨면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는지 새삼 확인시켰고, 그 자유 분방함을 벤치마킹하는 프로그램도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成宇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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