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사태와 팩스 아메리카나
  • 박권상 (주필) ()
  • 승인 1991.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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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죽여야 한다는 것, 그것은 어떤 명분, 어떤 이유에서든 죄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전쟁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그 아무리 목적이 숭고한 전쟁, 가량 신과 민족의 이름을 빌린 이른바 ‘성전’조차도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필요악이 필요한 때가 있다.

 이번 걸프전쟁을 놓고 생각할 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필요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만일 후세인의 백주강도행위를 전쟁의 두려움 때문에 묵인할 적에 그는 제2의 히틀러가 될 것이 분명하며 그렇게 될 때 중동에서의 세력 균형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경고를 어떻게 거역할 수 있는가. 일본이  만주를 들어먹었을 때 당시 국제연맹은 말만 하다 손들었고,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삼켰을 때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은 유화정책으로 독재자의 간덩이를 키워줘 제2차세계대전으로 치닫게 하였다. 만일 1948년 베를린 봉쇄에 연합국이 단호하게 대항하지 않았으면 유럽의 질서는 어찌 되었고, 만일 1950년 한국전쟁을 유엔이 수수방관하였다면 동아시아의 평화는 어찌 되었을까.

만일 후세인의 백주강도 행위가 묵인된다면
 걸프전쟁은 냉전종결 후 새로운 국제질서의 구축이라는 당면과제에 하늘이 내린 큰 시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백색 독재자들이 도발한 전쟁이 제2차세계대전이고 그들의 멸망으로 막을 내렸다면 전후 45년간의 동서냉전은 붉은 독재자들로 말미암은 끈질긴 이데올로기의 전쟁이고 그들의 멸망으로 막을 내렸다. 이제 세계가 정의와 자유 속의 문명적 새 질서를 구축할 수 있을지, 아니면 萬人이 萬人과 싸우는 양육강식의 ‘홉스’식 세계가 전개될 것인지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순식간에 이웃 쿠웨이트를 힘드로 병탐한 후세인 대통령은 동기와 목적 여부를 막론하고 1936년 이디오피아를 점령한 무솔리니나 1950년 남한을 침략한 金日成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후세인의 백조강도 행위를 전세계가 입을 모아 규탄했고 아랍국가들조차 대부분 후세인 응징에 나서는 데 동조하고 있다. 미·소가 손을 잡고 유엔이 만장일치로 무력제재를 결의한 것은 제2차대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이파크의 가까운 맹방인 리비아 같은 나라조차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철수론에 동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후세인의 침략 향동이 얼마나 파렴치한가를 입증하는 것이다. 무려 28개국이 미국 중심의 다국적군에 참여한 것 역시 이번 전쟁의 성격을 잘 알려주는 것이다.

 결국, 명분과 힘에 있어 침략자는 응징되고 조만간 손을 들 수밖에 없다. 후세인은 어떤 형태로든 생명을 잃든가 아니면 유엔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시일이 얼마나 걸리느냐가 문제일 뿐 결론은 분명하다. 그 결과로 세계질서는 아직도 ‘팩스 아메리카나’가 건재함을 입증할 것이다. 적어도 군사적으로는 미국 주도하의 세계질서가 상당 기간 유지될 것이라고 내다볼 수 있다. 그러나 군사력만이 오늘의 국제관계에 결정적 요소일 수 없다. 특히 경제적 뒷받침없는 군사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는 소비에트 제국의 급속한 붕괴과정에서 역력히 드러나지 않았는가. 한국전이나 월남전과는 달리 이번 전쟁의 엄청난 비용이 미국 아닌 다른 나라들의 출연에 크게 의존했다는 것은 팩스 아메리카나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돈이 오는 데서 명령이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에 따른다면 새 국제질서의 구축에 있어 팩스 아메리카나의 제한적 성격을 점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봉건군주들의 이익 지켜주는 게 정의와 평화인가
 또 한가지 눈여겨볼 일은 다국적군의 군사적 승리가 영속적인 중동령화와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느냐 하는 명제이다. 그렇다. 사담 후세인은 과대망상적 패권주의자임에 틀림없다. 동시에 그가 아랍 민족주의라는 강한 흐름을 타고 있는 사실도 가볍게 보아넘길 수 없다. 그들에렌 첫째 수백년간의 백인지배에 본능적으로 반발하는 소박한 민족감정이 있고, 둘째로는 외세를 끌어들여 석유자원을 독점·독식하고 있는 봉건적 지배세력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이 있다. 구체적으로 걸프 산유국들의 지배자들이 누구인가를 살펴볼 때 이번 사태의 성격을 흑백논리로 단정지을 수 없는 복합성이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가령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은 후세인의 침략을 분쇄하는 데 성공한 후에도 계속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면서 시대착오적 봉거군주들의 이익을 방어해야 하느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이 중동의 자요와 정의와 그리고 영속적 평화와 질서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뒤따른다.

 그뿐만 아니라 45년간 지속된 팔레스타인 분규가 있다. 같은 유엔인데 유엔의 만장일치 결정을 어긴 후세인의 침략 행위는 단호히 유엔의 이름으로 응징하면서 역시 유엔의 만장일치 결정을 25년간이나 거부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왜 손을 쓰지 않는 것인가. 유엔의 위선적 ‘이중적 기준’을 어떻게 합리화 할 수 있는지 이것 역시 중동사태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명제에 속한다. 분명히 중동은 세계의 화약고이고 따라서 거시적이고 폭넓은 접근방식이 요구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민주주의 진영은 다수 민중이 받아들이고 만족하는 기틀 속에서만 참된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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