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주체는 오직 한국민뿐”
  • 편집국 (sisa@sisapress.com)
  • 승인 1992.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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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목사 통역 린튼의 ‘평양 同行記’ …“강대국, 더이상 정치개입 요구 못해”

  미국의 세계적 부흥사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얼마 전에 북한을 방문했다. 그의 방북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통역을 맡았던 스티브 린튼씨의 동행기로 그의 북한방문을 조명 해본다. 필자 린튼씨는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남북한 교육과정에서 나타난 이데올로기〉로 종교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콜럼비아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편집자〉

 

  며칠 전 세계가 놀랄 만한 조용한 움직임이 있었다. 복음주의 기독교 교파와 미국의 보수주의적 가치관의 상징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평양에서 머무는 동안 북한 주민과 지도자들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았으며 교회 두곳과 김일성대학에서 연설할 기회를 가졌다.

  세계적 종교지도자 빌리 그레이엄, 공산주의의 몇 안남은 지도자인 김일성 주석, 그리고 남한 어느 시골에서 선교사의 4대 후손으로 자란 필자. 결코 만나야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극과 극의 세 사람이 한 방에 앉았다. 한국전쟁 전부터 이데올로기 분쟁에 휘말렸던 전라남도 순천에서 자란 필자가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란 호랑이 출현 같은 동화보다  좌우익의 잔인한 투쟁 이야기였다. 또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줍는 게 아니라 지리산에 남은 파편을 줍는 게 우리의 일상놀이였다.

  그 뒤 ‘한국학’을 전공하게 된 필자가 이번 그레이엄 목사의 평양방문을 위해 거의 1년간 일하게 된 것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우연이라기보다 신의 섭리라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를 방문하기 전 빌리 그레이엄협회가 하는 철저한 준비는 백악관보다 더 빈틈없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 평양방문에 따른 완벽한 준비를 위해 필자는 지난 1년간 평양을 세 차례 방문해야 했으며 미국 내에서도 20여 차례나 여행했다.

  3월28일. 빌리 그레이엄과 그의 아들 네드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협회 임원 3명, 특별히 두 교회에서 설교 통역을 맡은 필자의 작은 아버지 드와이트 린튼(전라남도에서 30년간 농촌교회를 위해 일하다 8년전 미국으로 돌아감) 목사 등 11명의 관계자와 CNN가자 2명이 북경에서 모였다.

  드디어 3월31일. 특별기편으로 평양에 도착한 그레이엄 목사는 50여명의 환영객 앞에서 도착연설을 했다. 도착성명에서 ‘미국정부의 사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왔다고 전제한 그레이엄 목사는 “금세기초 50년 동안 평양은 조선 개신교의 중심지였고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알려질 정도였다”면서 북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표시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건강 때문에 동행치 못한 아내가 어려서 다녔던 평양의 외국인학교를 보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4월2일 아침 9시. 나무 숲 사이로 꿩들이 보이는 한가로운 풍경을 지나 평양 도심에서 30여㎞ 떨어진 김일성 주석의 만수대 주석궁으로 갔다. 그는 80 고령인데도 정정한 모습이었다. 오찬에서는 서양인들의 입에 맞는 음식을 내놓았고, 김주석은 식사 내내 이런저런 화제로 대화를 이끌어갔다.

  이날 오후 그레이엄 목사의 김일성 종합대학 연설은 이 대학 강단에 선 첫번째 미국인이란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었다.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흥미없어 하거나 졸거나 팔짱을 낀 채 듣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짓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우리가 나누어준 연설문을 보며 경청하고 있었다.

 

“외국 군대는 한 나라를 찢을 수 있지만 하나로 꿰멜 수 있는 것은 그 나라 국민뿐”

  우리 일행으로 하여금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 일정은 뭐니뭐니 해도 평양외국인학교 방문이었다. 전쟁 전 그레이엄 목사의 아내 루스가 여학생 시절을 보냈고 필자의 아버지도 그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역시 해방 전 6주 동안 이 학교에 다닌 적이 있는 린튼 목사는, 이제는 산을 깎아내고 건물이 들어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도 용케 학교 터를 찾아냈다. 지금은 러시아대사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때마침 테니스를 치고 있는 젊은이가 담 사이로 보였는데 그가 입은 블루진에는 성조기가 붙어 있었다.

  3일 아침 장충성당 방문, 신부가 없어 미사를 드릴 수 없는 성당에서 그레이엄 목사는 예배를 드렸다.

  이번 방문 중 개인적으로 가장 감회가 깊었던 일은 필자 동서의 큰 형과 가족들을 만난 것이었다. 함경북도에 사는 그들은, 미국에 사는 친동생을 만나는 줄 알고 왔다가 코큰 이산가족을 만난 바람에 잠시 서먹서먹해 했다. 그러나 곧 식사를 같이 하며 어머니와 동생 소식을 물었다. 우리는 얼마나 상봉을 기다렸는가 이야기하면서 다같이 눈물을 흘렸다. 아마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에 백인이 끼기는 이번이 처음이리라.

  미국 역사상 어느 나라하고보다 오랫동안 적대관계를 지속해온 북한. 그들에게는 미국이 ‘철천지 원쑤놈, 승냥이의 나라’이다. 그러나 그레이엄 목사 일행은 따뜻한 환대를 받고 긍정적인 희망을 안고 평양을 떠났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한국에서의 냉전은 분명히 끝났다. 한국을 분단시킨 정서적인 상처들, 증오·쓰라림은 이제 막 치유되기 시작했지만 그 주변환경은 이미 수년 전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분단 책임이 미국과 소련에 있다는 것은 논쟁거리도 되지 않으며 점점 국제성을 잃어가고 있다. 두 초강대국 간의 경쟁으로 시작됐던 분단은 특성면에서 지극히 지역적인 의미를 갖는 경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평양에서 CNN의 마이크 체노이 기자가 필자에게 던진 첫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북한의 현주소가 공산주의의 산물이냐, 아니면 한국문화의 산물이냐.” 냉전에서 승리자는 없다. 동유럽이나 소련의 와해는 외부 세력보다는 내부 사정에 의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한국 문제’도 이제는 ‘한국인의 문제’다. 강대국이 한국을 분단시켰다는 것이 바로 강대국의 협력이 한국 통일에 필수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외국 군대는 한 나라를 찢을 수는 있지만 오직 그 나라 국민들만이 갈라진 나라를 하나로 꿰맬 수 있는 것이다.

  그레이엄 목사의 평양 방문은 지금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반영이었다. 외부인들은 한국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 중에서 선택하면 되겠지만 더이상 한국의 사안들에 대해 중요한 역할을 하겠노라고 심각하게 요구할 수는 없다.

  그레이엄 목사는 한국의 고통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표명했으며 한국 국민이 조국을 치유하는 방법을 찾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방법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지도나 조언은 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원칙이 주는 자유, 국적을 초월할 수 기독교인이 갖는 그 자유와 비전을 가지고 성공적으로 방문을 끝냈다. 준비단계 초기에 그레이엄 목사는 미국정부가 이번 방문을 허락했느냐 하는 질문을 받았다. 평양과 워싱턴이 핵문제로 팽팽하게 긴장해 있는 때인 만큼 적절한 질문이었다. 그는 “나는 우리 정부의 의견을 참고할 수는 있으나, 내가 어디를 가고 안가고는 나의 결정이다”라고 대답했다.

  옛 친구를 저버려야만 새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미국에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북한과 남한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이 화해할 수 있는 은혜를 받도록 기도를 부탁할 것이라고 했다.

  반세기 동안 군사와 정치로 해결점을 찾지 못하는 때에 민간 차원에서 마음과 마음의 다리를 놓는 것이 한반도 평화통일의 지름길임을 생각케 하는 평양 방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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