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감시할 것인가
  • 박권상 (편집 고문) ()
  • 승인 1993.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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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국가는 정보 국가다. 그러나 국가의 정보 활동이 정권을 유지하는 도구로 악용되면 경찰 국가가 된다.”

벌써 꽤 오래된 일인데 미국의 정치학도 앨몬드와 버바라는 두 교수가 미국 영국 서독 이탈리아 멕시코 다섯 나라의 이른바 문민 문화(civic culture)를 조사한 일이 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다섯 나라 시민들에게 여러 항목의 질문을 던져 정치 문화와 관련된 반응을 정리하였는데, 한 항목에 ‘국민생활에서 어느 것이 가장 자랑스러운가’라는 것이 있었다.

 이 질문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작 2.5%가 그들의 정부가 하는 일을 지적하였다. 철저한 불신이었다. 서독 사람들도 정부에 대해서는 별로 좋은 감정이 아닌 것 같았다. 겨우 4%만이 정부에 대해 신뢰하며 높은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영국 사람들은 무려 33%가 정부 하는 일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어디 그뿐인가. 절반 이상은 공무원들이 보통 사람들의 개인 문제를 진지하게 배려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가 하면, 특히 4분의 3이 넘는 응답자가 경찰관이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영국에서는 경찰관에 대한 일반인의 신뢰가 절대적이다.

 또한 3분의 2 이상이 그들의 힘으로 국가의 정책을 좌우 할 수 있고, 5분의 4 이상이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었다. 끝으로 5분의 4가 공무원으로부터 ‘공정한’ 대접을 받는다고 답했고 10분의 9가 경찰한테 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 경찰이 신뢰받는 까닭
 지구상에 이렇듯 정부 및 공무원이 국민에게 신임을 받는 나라가 있을까. 특히 경찰 공무원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은 무엇을 뜻하는가.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왜 국민과 정부 사이가 이렇듯 끈끈하고 차진 것일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앞서 인용한 질의응답에 이미 나타나 있다. 공무원이 국민한테 정중하고 바르고 공정(fair)하다는 것이다.

 ‘법은 곧 정의’라는 개념이 공무를 집행하는 공무원이나 시민 할 것 없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 있는 까닭에 공정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고 편파적이거나 일방적이거나 하물며 편법․불법적인 처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들은 ‘상식’을 창조한 국민이다. 공무원들, 특히 법을 집행하는 관리는 상식에 어긋나거나 사리에서 벗어난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따금 시비거리 가 되는 은폐 수사 따위는 상상할 수 없다는 점, 여기에 바로 영국의 경찰이 신뢰받는 근원이 있다.

 영국의 정보기관은 ‘007영화’의 모델이다. 그만큼 능력이 탁월하다. 국민이 좋아한다. 그러나 KGB나 모사드, CIA나 국가안전 기획부의 경우와 달리, 공식 명칭조차 없다. 내무부 소관인 MI5는 적의 스파이 침투를 막는 기구이고 MI6은 해외로 스파이를 보내는 기구이다. 전자는 내무장관 지휘를 받고 후자는 외무장관 지휘를 받지만, 책임자들은 총리에 직접 보고한다. 그러나 몇해 전까지만 해도 어디에 본부가 있는지 누가 지휘관인지조차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정보기관 활동, 국가 안위에 국한해야
 63년 고급 창녀 크리스틴 킬러와 육군장관 존 프로퓨모와의 염문 사건이 터졌다. 킬러는 소련 해군 무관과도 관계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전도유망했던 프로퓨모는 장관직은 물론 의원직까지 내놓고 영영 사회에서 매장되었다.

 그가 물러간 것은 고급 창녀와의 염문 때문이 아니고 하원에서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뗀 데 대한 도덕적인 이유였다. 당초 저급대중지가 이  사실을 가십거리로 다루었을 때 야당 의원이 사실 여부를 따졌는데 엉겁결에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뗀 것이 들통나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때 맥밀런 총리의 보좌관은 M15 책임자에게 왜 프로퓨모와 킬러의 관계를 총리에게 보고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M15 책임자의 반박이 당당했다. ‘아시다시피 영국은 경찰 국가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M15에는 엄한 수칙이 있다. 각료들의 사생활은 국가 안위와 관련되지 않는 한 M15의 감시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64년 노동당 정권이 들어서자 해롤드 윌슨 총리는 M15가 각료나 국회의원을 사찰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으며, 국가안보상 꼭 필요한 경우에는 총리의 명시적인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이따금 M15는 타블로이드 신문의 화제거리로 등장한다.

 지난달 중순 3백만부를 파는 <데일리 선>은 M15가 찰스 왕세자와 다이아나 왕세자비 간의 전화를 녹음했다고 폭로하였다. 내용은 작년 성탄절 때 두 아이를 누가 관리하느냐를 두고 벌인 논쟁이었다. 국회에서 말썽이 나고 영국이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무근으로 가라앉았다. 다행한 일이다.

 현대 국가는 정보 국가다. 그러나 정보 활동이 정권을 유지하는 도구로 악용되면 경찰 국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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