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기업 대변혁 “살빼야 산다”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3.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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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반 타의반’ 잇단 계열사 정리…기술개발ㆍ정보력 강화에 초점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 그룹들의 잇단 계열사 정리 조처는 재벌에 대한 통념을 크게 흔들고 있다. 그동안 몸집 부풀리기를 지상과제로 여겨온 재벌그룹들이 차례대로 자신의 ‘살점’을 도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에 이어 삼성그룹이 지난 6월9일 사장단회의를 열고, 대규모 계열사 정리방안을 밝혔다. 삼성그룹이 이같이 조처한 이후 다른 재벌 그룹들은 애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더욱 강도 높은 계열사 정리 방안을 마련하느라 고심하고 있다. 이를 두고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의 金昌洙 연구위원은 “재벌 그룹들의 왕성한 팽창 욕구가 요즘처럼 주춤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현재 럭키금성그룹ㆍ대우그룹ㆍ선경그룹은 한격같이 계열사 정리방안을 검토중이며, 곧 발표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국내 그룹 가운데 산하 계열사가 가장 많은 럭키금성그룹은 3~4개 이상의 계열사를 통ㆍ폐합하는 것을 검토중이다. 대우그룹은 계열사 가운데 대우통신을 분리하기로 방침을 확정한 상태다. 다만 그룹의 모기업인 제일제당과 제일모직가지 정리 대상으로 선택한 삼성그룹의 수준과 맞춰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 참여 업종 수가 많지 않고, 계열사도 대부분 외국 기업과의 합작회사인 선경그룹은 딱히 정리할 계열사가 없어 고민하고 있다.

5대 재벌 그룹이 주도하는 계열사 정리 작업은 정부의 최근 업종 전문화 조처에 스스로 부응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김영삼정부는 한편으론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대신, 다른 한편으론 재벌의 자발적인 변신 노력을 촉구해왔다(69쪽 기사 참조). 김영삼 대통령은 특유의 ‘정치력’으로 재벌의 계열사 자진 정리를 유도했다.

수익성 낮은 사업 손떼고 전략사업 주력
그러나 재벌의 제살 깎기는 단순히 정치적 ‘입김’에 의한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창업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가는 과정의 재산 분할이라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경영 측면에서도 재벌 그룹들은 스스로 계열사를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왔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그동안 럭키금성그룹과 대우그룹이 벌여온 계열사 정리 작업이다. 91년 4월부터 올해 4월까지 두 그룹의 계열사 수는 각각 8개와 2개로 감소했다(표 참조). 계열사 수가 늘어난 현대와 삼성 그룹도 수익성이 낮은 시장에서 철수하거나 그 사업부를 매각해왔다. 그동안 야심적으로 개인용컴퓨터(PC) 시장에 뛰어들어 활발한 해외 생산을 했던 현대전자가 좋은 예다. 이 회사는 92년말 경기도 이천공장에서 생산해왔던 수출용 PC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미국 현지법인 생산량도 점차 줄이고, 현지인 부사장인 에디 로머스도 해고했다. 현대자동차는 자동차의 핵심부품 생산라인을 상당 부분 중소기업에 넘겨줬다.

삼성그룹도 지난 2년간 제일제당의 비료사업, 삼성코닝의 흑백브라운관용 유리밸브 사업, 삼성항공의 반도체 리드프레임 제조설비를 정리했다. 나아가 삼성그룹은 14개 계열사를 매각ㆍ합병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해, 계열사가 48개에서 34개로 줄게 됐다. 정리될 계열 기업들은 매출액 규모로 2조1천7백억원, 자산은 2조3천2백억원에 종업원 수는 1만 3천명에 달한다. 삼성그룹의 이 조처는 91년 11월 신세계 백화점과 전주제지 등 7개사 분리에 이어 2단계로 취해진 것이다. 이로써 삼성그룹은 5대 그룹 가운데 대우그룹 다음으로 계열사 수가 적은 그룹이 됐다(공정거래위원회 기준은 아직도 55개).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적 계열화를 완성한 선경그룹 정도가 지난 2년간 확장을 계속해온 그룹에 속한다.

재벌 그룹들은 왜 스스로 변하려는 걸까. 정부는 왜 재벌의 변신을 촉구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요즘 재벌 그룹 총수들이 느끼고 있는 ‘위기의식’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쉽게 풀린다. 滋暻 럭키금성 그룹 회장은 자서전에서 위기의식을 다음과 같은 말로 간단히 정리한 적이 있다. “이대로는 죽는다.”

재벌 그룹의 경영 환경은 그만큼 나빠졌다. 우선 유례없이 긴 경기 침체를 맞은 데다 생산비마저 급등했다. 더욱이 수입 장벽이 무너지고 중견 기업들이 등장하면서 국내 시장에서의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몸집 부풀리기에만 신경써온 재벌 그룹들이 이제 홀로서기를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남의 논리 아닌 자기 논리로 변화해야”
재벌 그룹들은 수익성이 낮은 사업에서 철수함으로써 전략 사업에 더욱 전념할 수 있게 됐다. 일본 장은연구소가 작년 초에 발표한 <경영환경의 변화와 한국재벌의 대응>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재벌들은 오히려 전략 사업 통합을 서두르고 있다. 기술 개발과 정보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략사업 부문간, 계열사와 하청회사 간의 결속을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기업과 주력 기업을 과감히 떼어낸 삼상그룹만 하더라도 그룹이 3대 핵심 사업으로 꼽고 있는 전자ㆍ엔지니어링ㆍ화학사업 간의 연계성은 더욱 높일 예정이다. 그리고 사업구조상 필요하다면 신규 분야에도 과감히 뛰어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삼성그룹의 2단계 계열사 정리조처가 삼성중공업이 승용차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은 이 때문에 나온 것이다.

재벌 기업들은 지난 몇 년간 사상 유례없는 구모로 조직ㆍ인사제도를 개편해왔다. 양적 성장기조가 일단락되면서 재벌 그룹들이 그룹 내부의 경영 효율성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재벌 그룹들은 조직을 간소화하고, 불필요한 인원을 줄이거나 재배치하는 등 감량 경영에 나서고 있다. 그동안 지나치게 비대해진 관리직 사원에 대한 부담을 어떤 식으로든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대우자동차처럼 종업원 수를 늘리지 않고 생산성을 높이려는 기업이 점차 늘고 있다.

각 재벌 그룹의 회장비서실이나 기획조정실을 대폭 축소하고, 계열사 경영진의 권한을 크게 늘려준 것도 중요한 변화다. 럭키금성그룹은 90년부터 ‘V프로젝트’에 따라 그룹 기획조정실을 없애고, 본사의 권한을 계열사로 이양했다. 본사 조직으로 남게 된 ‘회장실’도 규모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그룹회장의 참모조직으로 남게 됐다. 회장의 권한도 계열사 사장에 대한 인사권과 그룹 차원의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것으로 한정됐다. 방대하한 회장비서실과 기획조정실을 운영하고 있던 삼성그룹과 대우그룹은 ‘작은 본사’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일본의 대표적 한국 재벌통인 나고야 대학의 야나기마치 이사오 교수는 한국 재벌들이 사업구조를 고도화하면 할수록 성장의 벽에 부닥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첨단산업일수록 막대한 기술개발비와 시설투자비가 드는데, 재벌들이 이를 감당할 능력이 있느냐는 것이다. 삼성ㆍ금성ㆍ현대그룹이 참여한 반도체 시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기억용량이 좋은 반도체일수록 개발ㆍ생산하는 데 많은 자금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상품의 수명주기도 짧아진다. 90년을 기준으로 할 때 일본 반도체 생산업체들은 1조엔(약 5조원)을 순수하게 연구개발비와 설비투자비로 썼다. 그는 “그 비용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텐데, 과연 한국 기업이 그럴 여력이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 재벌 그룹들이 참여한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다.

재벌 그룹이 계열사 간에 기술협력을 강화하고, 다른 그룹과 전략적 제휴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우그룹은 기존 기술연구소와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한계를 극복하고 효율적인 기술네트워크를 확보하기 위해 그룹 차원의 종합연구원을 설립할 예정이다. 삼성그룹은 올해 초 산업 전분야에 걸친 종합 연구소인 종합기술연구원을 설립하고, 이를 확장해나갈 예정이다. 다른 그룹들도 각 계열사 별로 분리된 연구소를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룹 간의 전략적 제휴는 92년 6월에 금성사와 삼성전관 사이에 ‘상호 특허 실시 계약’을 맺은 것을 계기로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한편 재벌 그룹 계열사간의 정보체계는 단일화하고 있다. 현재 각 그룹은 모든 계열사를 하나로 묶는 독자적인 정보망을 갖추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6월초 럭키금성그룹이 ‘엘지트윈스’라는 정보망을 완비함으로써 네트워크를 갖추게 됐다. 결국 재벌 그룹 계열사 간의 인적 교류나 금융협력, 내부거래는 점차 축소되는 양상을 보이지만 기술개발이나 정보유통 측면에서는 점차 통합되는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鄭??絃 교수(연세대ㆍ경영학과)는 “과거에 주로 계열사 간의 결속을 강화하는 데만 신경을 써 온 대기업 집단들은 이제 기술과 정보를 그룹의 중심축으로 하는 새로운 분화와 통합을 거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벌의 이러한 변모가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당장 계열사의 수를 줄여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큰 관련성이 없는 계열사를 통ㆍ폐합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의 孔柄淏 연구위원은 “분화할 것을 제대로 분호시키고, 통합할 것을 제대로 통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자기 변신의 논리는 남의 논리가 아니라 자기 논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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