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피살, 집념의 추적자들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2.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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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영ㆍ권중희 등 … 27년간 범인 미국행 막고 숨은 곳 찾아내



 “눈내린 들판을 갈 때는 어지러이 걷지 말라. 오늘 남긴 발자취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느니라.”

 미군정 하에서 白凡 金九 선생이 “남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은 분단을 고착화한다”고 남북회담을 추진하면서 남기 踏雪詩이다. 이 시를 지은 뒤 얼마 안돼 백범은 당시 포병소위였던 安斗熙에게 피살됐고, 백범이 염려한대로 우리나라의 역사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어지러운 행보를 계속해왔다.

 그로부터 43년이 지난 오늘 75세의 노인이 된 암살자 안두희가 백범의 암살을 사주한 인물들에 대해서 조금씩 입을 열고 있다. 아직은 여기서 이 말 하고 저기서 저 말 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배후세력의 존재를 강력히 부인하지는 않고 있다. 국회에서도 여야가 동시에 진상조사단을 구성할 뜻을 비쳤기 때문에 건국 이후 최대의 의혹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백범 암살사건은 다시 역사의 조명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면 백범 암살사건을 기어코 역사의 심판대 위에 끌어올린 사람들은 누구일까. 곽태영씨(57ㆍ백범독서회 회장)와 권중희씨(56ㆍ민족정기구현회 회장). 어느 모로 보아도 보통사람인 이 두사람이 없었다면 백범암살사건은 아마도 벌써 세인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은 백범의 피로 양손을 적신 뒤 유유히 빠져나와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던 안씨를 수십년간 집요하게 추적해 결국 “배후세력이 있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곽씨는 열두살 때 소학교에서 백범의 피살소식을 들었다. 수업시간이 돼도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아 교무실에 가보니 모두들 부둥켜안고 통곡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항일운동을 했던 작은 아버지와 아버지도 문을 걸어잠그고 통곡하며 “나라가 망했다. 이승만이가 기어코 백범 선생을 죽였다”며 분개하고 있었다. 그 때 백범이 무척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인상이 뇌리에 새겨졌다.

 그 뒤 서울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시간이 나면 효창공원 백범 묘소에 들러 참배드리곤 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자유당정권의 부정부패가 폭로되는 것을 보고 백범암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55년 12월 곽씨는 백범의 묘비 앞에서 “10년 안에 반드시 암살 배후를 밝혀내고 안두희를 제거하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국학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한 곽씨는 안두희의 소재를 파악하고 끊임없이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안씨가 언제나 개인 경호원을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좀처럼 기회를 포착할 수 없었다. 65년 12월 백범과 약속한 10년 기한이 다가오자 곽씨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거사준비에 착수했다. 당시는 안씨가 강원도내 11개 사단에 군납물자를 대면서 도에서 납세실적 1~2위를 다툴 정도로 치부하고 있던 때였다. 곽씨는 재크나이프를 품고 안씨가 거처하는 양구로 내려가 행상으로 가장해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양구에 내려간 지 8일 째인 12월 22일 아침 곽씨는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 근처에 사는 안씨 공장의 중역 부인들이 안씨에게 찬거리를 갖다주느라 문이 열려 있었고 그 틈새로 안씨가 마당에서 세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곽씨는 며칠 전부터 고기덩어리를 던져주며 친해둔 송아지만한 셰퍼트의 옆을 지나 안씨에게 무사히 접근했다.

 목에 칼을 들이대고 “백범 암살의 배후를 대라”고 다그치다가 유도와 검도로 단련한 안씨가 덤벼드는 바람에 격투가 벌어졌다. 곽씨는 안씨의 완력에 눌려 오히려 목숨을 빼앗길 뻔했으나 “백범선생의 도움으로” 안씨를 거의 죽은 목숨으로 만들었다. 목에 두 번의 칼질을 하고 돌멩이로 허연 골이 드러날만큼 이마를 짓뭉갰던 것이다.

 안씨는 세 번의 뇌수술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그 뒤로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회사 중역들이 거액을 챙겨 잠적했기 때문에 더 이상 군납업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안씨는 부도를 낸 뒤 세상의 이목을 피해 이름을 숨기고 잠적했다.

 곽씨의 추적은 집요하게 계속됐다. 74년에는 백범 암살단의 일원이었던 홍종만을 찾아내 양심선언을 시킨 뒤 신문기자들을 대등하고 안씨의 집에 쳐들어가 안씨와 홍씨를 대절시키기도 했다.

 

아무리 도망가도 어김없이 찾아내

 또 81년 12월에는 안씨가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도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를 저지했다. 당시 안씨는 부인과 5남매를 먼저 미국에 보내고 자신도 출국하려고 비밀리에 여권수속을 밟던 중이었다. 곽씨는 이강훈 광복회 회장 등과 함께 미대사관에 달려가 항의한 끝에 참사관으로부터 “앞으로 안씨에게는 영원히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이 때문에 안씨는 가족과 생이별하고 추적자들의 손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신세가 됐다.

 “안씨가 김창룡이나 장택상 정도의 인물들로부터 ‘암시’만을 받고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 리는 만무합니다. 안씨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도 수년간 군납업을 계속할 정도로 이 사회 집권세력과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붙어 민족의 고혈을 빨다가 다시 미국에 붙어 민족지도자를 살해한 그들의 정체는 이번 기회에 꼭 밝혀져야 합니다”

 곽씨는 우리 민족의 비극은 백범의 암살로부터 비롯된 만큼 그 해결의 실마리도 백범의 암살 배후 규명에서부터 찾아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번에 안씨로부터 “배후 세력이 있었다”는 실토를 받아낸 권중회씨는 84년부터 추적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87년 안씨를 박달나무 몽둥이로 응징해 유명해진 권씨는 지난 8년간 안씨를 추적하면서 한번도 놓친 일이 없을 정도로 무서운 집념을 보였다.

 권씨는 안씨 집 주변의 주민들에게 안씨가 이사를 가면 밤이든 새벽이든 이삿짐센터의 차량번호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해 어김없이 안씨의 은신처를 찾아내곤 했다. 안씨는 어디로 이사를 가든 그 다음날이면 반드시 권씨가 얼굴을 내밀다 기가 질려 지난 87년부터는 아예 이사 다닐 엄두도 못하고 내내 지금의 인천 집에서 눌러 살아왔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안씨를 찾아갔습니다. 이번에도 바른 말을 하지 않으면 천수를 누리게 놔두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안씨는 12일 권씨 등의 닦달을 받고 실토한 이틀 뒤인 14일 M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미국 정보기관원으로부터도 백범을 암살하라는 암시를 받았었다고 얘기했던 것은 권씨가 고문을 하며 강요했기 때문이었다고 번복했다. 이에 대한 권씨의 의견은 매우 간명하다.

 “제가 안씨를 몇차례 때린 것을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그 사실은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 까닭은 내가 안씨를 때렸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값싼 동정심이 진실이 훼손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두희, 아직도 진실 다 안 밝혀”

 권씨는 또 미국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는 “안씨가 회견하는 것을 보고 역으로 미국이 백범의 암살에 개입했다는 사실에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안씨가 MBC와의 회견에 응한 것은 단 한가지 이유, 즉 미국의 개입 문제를 번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미국에 살고 있는 처자식의 안위를 걱정했든가 아니면 누군가 그들을 볼모로 안씨를 협박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얘기했다.

 권씨는 “백범 암살은 한미합작품이며 굳이 따진다면 주범은 미국이 틀림없다”면서 앞으로는 이 문제를 규명하는 데 전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권씨는 또 “이제 진실에 대해 겨우 운을 떼기 시작한 안씨가 더 이상 진실을 밝히기를 거부한다면 결국에는 처단할 수밖에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곽태영씨나 권중희씨가 안두희를 집요하게 추적할 수 있었던 것은 ‘동지’들의 도움 덕택이었다. 김용삼(43ㆍ한겨레신문 지국장), 김광준(44ㆍ전통조경업), 임한재(43ㆍ회사원), 윤석명(33ㆍ사법고시 준비중)씨 등은 벌써 10년이 넘게 곽씨와 교분을 맺고 그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각종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이이들의 미끄럼놀이터로 전락했던 백범의 묘소에 잔디를 다시 깔고 새단장을 하는 등 유적 관리를 위해서도 노력해왔다. 또 백범사상선양회의 김석용 회장과, 87년 안두희의 집에 들어가 가구를 몽땅 부숴버린 바 있는 정용호씨, 그리고 이번 12일의 ‘거사’에 큰 몫을 했던 한국독립당동지회의 육철희 등은 거의 생업을 돌보지 않고 권중희씨를 도왔다.

 각박한 현대생활에서 이들의 삶은 기이하게 비칠지 모르지만 이들에게는 애국선열들의 은덕을 잊고 사는 요즘 세태가 오히려 이상하게만 보이는 모양이다.

 “재벌 총수의 기념관은 호화롭기 그지 없는데 백범기념사업회는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것이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정기의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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