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궁창에서 더욱 돋보이는 청렴
  • 박중환 차장 ()
  • 승인 1991.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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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태 전 국무총리, 쓰고 남은 공금 10달러 명세서와 함께 반납
 逸石 卞榮泰. 그 이름만 되새겨도 샘물처럼 신선하다. 시궁창처럼 썩은 요즘 ‘윗물’들의 부패는 근본적으로 공과 사를 가리지 못하고, 직위를 이용해 자신의 뱃속을 더욱 불리려는 과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을 위해 사를 용감히 버렸던 변영태의 생애는 오늘날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다.

 그의 공직생활을 이야기할 때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49년 대통령특사로 필리핀에 갔다가 돌아온 뒤 여비 사용명세서와 함께 남은 공금 10달러를 李承晩 대통령에게 반납한 일화이다. 그는 그 뒤에도 해외에서 돌아오면 많게는 3천달러를 국고에 반납했다. 필리핀 방문시 그를 수행했던 金溶植 보좌관(전 외무장관)은 “세탁비를 아껴야 한다며 호텔에서 직접 옷을 빨아 입으셨고, 호텔의 식사값이 비싸다며 중국집을 찾았다가 그 주인이 우리 일행을 알아보고 ‘일국의 특사가 왜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하느냐’고 묻는 바람에 나라의 체통을 세워야해 비싼 요리를 시켜 먹은 일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의 조카인 卞恭壽씨 (현 한국투자금융고문)는 “그렇다고 융통성이 없는 분은 아니었다”고 덧붙인다. 일석이 54년 제네바 국제회의 대표단장으로 가서 보내온 전문을 보면 그가 ‘자린고비’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4월27일자를 보면 항공료가 환율인상으로 1천1백50달러가 초과돼 정부에 환급을 요청했다. 싸구려 호텔에 묵다 보니 회담장과 거리가 멀어 택시비가 많이 들자 “이 돈으로 현지에서 승용차를 한대 구입해 쓰면 태극기를 달 수 있고, 귀국시 되팔면 절약할 수 있다. 마침 외무부에 외빈용 승용차가 없으니 이 차를 반입라면 어떻겠는가”라고 물어온 기록이 있다.

 그는 자유당 정권에서 외무장관(51~55)에 이어 국무총리와 외무장관을 겸임(56~61)했다. 그는 야당의원들로부터는 존경을 받아 63년 5·16군사정권의 민정이양 당시 야권연합 대통령 후보로 옹립됐으나 막판에 尹潽善씨에게 밀렸다(鄭求瑛 비망록). 그는 正民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출마했으나 참패하자, 훌훌 털고 영어학원의 강사를 하며 생계를 이었다. 주변에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하느냐”고 말하면 “노동이란 신성한 것이다. 돈까지 주니 얼마나 좋은가” 라고 말했다 한다.

 그는 69년 향년 77세로 타계했다. 그의 유산은 붓다 만 3백만원짜리 적금통장과 전대에 물려받은 밭뙈기, 그리고 집이 고작이었다. 아니다. 그가 남긴 것은 영원히 살아 있을 이름이다. 요즘 ‘윗물’들은 이름의 값어치를 매길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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