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싸인 ‘하얀 전쟁’
  • 편집국 ()
  • 승인 1992.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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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철수 19년, 사상ㆍ실종자 수 不明…“자발적 개입” 추론도 나와



“만약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각본을 고쳐쓰게 될 것이다. 그 각각의 시체 가방들, 그 집단 묘지들이 온통 다시 열리고 주문에 걸린 시체들은 고상한 대의명분으로 둔갑할 것이다.”(베트남전 참전자 조지 스와이어 1984년)

 “참으로 우리 자신들이 숭고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싸웠음을 인식할 때가 됐다”(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1980년)

 이와 같은 ‘의미있는 인용’으로 기사 도입부를 이끌어 가는 방식은 ≪타임≫같은 시사주간지들이 무거운 주제나 토픽을 다룰 때 흔히 쓰는 고전적 접근방법이다. 그러나 미국과 같이 겪은 그 베트남전에 관해 기사를 쓸 때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기가 매우 힘들다. 불행하게도 베트남전에 관한 한 우리는 이와 같은 ‘의미있는 인용’으로 시작할 만한 ‘의미있는 발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베트콩 귀를 베어 차고 다녔다”는 식의 무용담만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상사’의 술자리에서 구전되었을 뿐 아무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고 아무도 말하려 들지 않는 묵비의 전쟁. 30여만명이 참전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상자 수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전쟁. 우리에게 베트남전은 여전히 잊혀지고 숨겨진 전쟁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10년 가까이 30만명이 넘는 피끓는 젊은이들이 이역만리 적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고 그 중 5천명 가까운 생떼 같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친 전쟁, 그보다 몇곱절 더 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을 그 전쟁을 그토록 쉽게 잊을 수 있을까. 도덕적ㆍ역사적 정당성이 결여된 전쟁에 가담해 강대국의 ‘대리전’을 치른 데서 오는 죄의식이 우리의 말문을 트이지 못하게 하는걸까. 아니면 미국이 패배한, 미국이 필요로 할 때는 언제나 이용 가능한 국제협조군이었던 한국 또한 패배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말이 없는 걸까. 그래서 “지난날 우리가 언제 서로 총질을 해댔느냐”는 듯 말끔히 잊고서 오늘 수교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까.

 지난 2월29일 국방부가 발표한 파월중 전사자 현황(40쪽 도표)은 바로 이와 같은 본질적인 의문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월남전 참전기간중(64년 9월22일~75년 4월30일) 월남에 파병된 연병력은 31만2천8백53명이고 그 중에서 전사한 장병은 모두 4천6백87명이다. 이 가운데 전투중 사망은 4천6백24명이고 기타 전사가 63명이다. 국방부에 따르면 전투중 사망자는 육군이 3천5백30명, 해군(해병대)이 1천94명이다.

 

전사자 현황 92년 2월에야 첫 발표

 그런데 문제는 월남전 전사자 현황이 국방부에 의해 공식으로 발표된 것이 놀랍게도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나마 사망자만 발표에 들어 있을 뿐 부상자나 그 밖에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실종자나 포로에 관한 통계는 들어 있지도 않다. 하다 못해 교통사고도 날마다 ‘사상자’를 발표하는데 한국군이 철수한 지 19년이 지나도록 전쟁의 사상자를 공개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번 발표가 자의적으로 이제는 공개할 때가 되었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언론의 실종자 문제제기로 어쩔 수 없이 나온 발표라는 점과 그나마 신빙성이 없어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일부에서는 실종자 수효에 대한 강한 의혹 등 통계의 허술함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40쪽 관련 기사 참조).

 그동안 월남전 전사자 현황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던 국방부가 2월29일 느닷없이 발표한 것은 그날 <경향신문>에 보도된 ‘실종 파월장병 3명 살아 있다’는 기사 때문인 것을 보인다. 이 신문에 따르면 지난 67년 12월2일 실종된 당시 백마부대(9사단29연대) 소속 박우식 대위(당시30세)와 박성렬 중사(65년 11월30일 실종), 김인수 상병(65년 2월18일 실종) 등 3명이 베트남과 제3국에 생존해 있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는 것이었다.

 이 보도와 관련해서 당시 국방부 관계자는 “지난 87년 4월 미국의 전쟁포로ㆍ실종자를 위한 재향군인회에서 한국군 실종자 명단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 보내주었다”면서 “앞으로 이들의 생사 여부와 소재를 파악해 만일 살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 관계기관과 협조, 송환에 힘쓰겠다”고 밝힌 바 있다. 국방부 인사과에 따르면 군인사법 시행규칙 제73조에 의거, 전투중 행방불명된 자는 해당 전투가 종료된 날로부터 2년이 경과하면 ‘전사’, 그 밖에 재해나 불의의 사고로 인한 행불자는 ‘순직’, 탈영의 경우 ‘사망’ 등으로 처리하는데 박대위를 포함한 실종자 3명은 전사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20여년 만에 나타난 실종자 3명의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작 당혹스러워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그 가족이었다. 박우식 대위의 ‘미망인’이었던 최재금씨는 남편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정부가 아닌 언론으로부터 먼저 들었다. 그러나 최씨는 여전히 정부로부터는 어떤 연락도 받은 바가 없기 때문에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진보적 관점에서 한국군 파병 배경을 밝힌 프랭크 볼드윈의 논문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한국군 이용>은 우리가 왜 베트남전을 잊을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한ㆍ미 양국 정부는 파월 한국군의 참된 성격을 끊임없이 은폐ㆍ호도ㆍ검열ㆍ기만했다. 65년부터 67년까지 존슨 정부는 한국군을 파월시키면서 의회와 국민을 줄곧 속여왔다. 닉슨 정부는 한국군의 잔학행위가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계속 차단시켰다. 한국 정부는 파월 한국군의 역할과 실상에 대해 자국민에게 그 진실을 알리기를 꺼려했다. 심지어 70년 사이밍턴 소위원회의 청문회에서 한국군 통계자료가 제시되기까지는 사상자의 숫자조차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베트남전으로 학위를 받은 몇 안되는 소장 학자 중의 한 사람인 홍규덕 박사(민족통일 연구원)는 논문을 쓰는 내내 ‘왜 우리는 베트남을 그렇게 쉽게 잊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홍씨가 내린 결론은 미국이나 호주에서처럼 ‘트라우머’, 즉 정신적 외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베트남전을 계기로 △경제가 부흥했고△미국과 어깨를 견줄 만한 대등한 권리(국가적 위신보다는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프라이드 차원에서)를 얻었고△무엇보다도 군부의 강화와 득세의 길이 열렸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이같은 경제부흥의 논리와 냉전구조에 의해 베트남전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파묻혀왔다는 것이다.

 

“한국은 정신적 외상없어 망각”

 흑과 백의 이분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베트남전을 ‘이성의 눈’으로 살펴본 최초의 저술로 평가받는 이영희 교수(한양대)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최초의 금서가 됨으로써 학문적 단절을 야기했다. 그래서 베트남전은 개입에서부터 철수에 이르기까지 재조명돼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우선 한국의 베트남전 개입만 해도 미국의 파병요청(공식적으로는 늘 월남 정부의 요청이었지만)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미국에 ‘월남전 카드’를 제시했다는 새로운 추론도 나오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이 한국전쟁으로부터 부흥의 초석을 다졌듯, 이른바 월남특수를 통한 경제부흥에 커다란 기대심리를 가졌을 것이라는 추정은 설득력이 있다. 더구나 혁명의 가시적 당위성을 경제개발에서 찾으려 했던 박대통령의 신념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기대가 컸을 거라는 지적이다. 홍규덕 박사는 교섭 당시 미국무성과 주한 미대사 브라운과의 전문에서도 한국의 적극적 개입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 눈에 띈다고 말한다.

 또 철수를 둘러싼 논란과 의혹도 그치지 않고 있는데 71년 이후 한때는 한국군이 미군보다 더 많이 주둔하고 있던 점, 미군보다 철수가 더 늦은 점 등이 모두 한국정부의 자발적 개입을 뒷받침하는 증거라는 주장이다.

 한국측의 요구에 따라 66년3월4일 작성된 이른바 브라운각서는 당시 한ㆍ미간의 기본약정을 문서화한 것이었는데 그 대가로 한국군에게는 늘 ‘용병’이라는 꼬리가 따라다녔다. 전쟁중의 잔혹행위에 대한 시비는 대개 미국 의회와 학계, 그리고 언론으로부터 나온 것이나 실제로는 상당히 과장됐다는 지적도 있다.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의 창시자인 탕 트로웅 누고의 회고록 ≪베트콩 비망록≫에는 한국군의 잔혹성에 항의해 조기 철수를 주장하는 베트남 주민들의 ‘관제데모’를 유도하고 한국군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선전공작을 시도했는데 이는 워싱턴의 반전 분위기를 겨냥한 것이었다는 내용도 있다.

 

과거를 청산하는 숙제 남아

 그러나 잔혹행위의 사례도 없지 않다. 최근 백마부대에 근무한 한 장교에 따르면 한 국군이 작전중 베트콩의 귀를 베어 차고 다녔다고 한다. 특히 깊은 산중에서 작전을 펼 경우 사살한 시체를 일일이 운반할 수가 없어 베트콩 귀를 베어 이를 가지고 전과를 산정했다는 것인데 장교들도 이를 묵인했다는 주장이다. 또 무기를 노획해야 전과가 산정되는데 모든 베트콩들이 다 소총을 지니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소총 대신 귀를 잘라와 전과를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파월유공전우회에서는 이에 대해 파월 초기에는 일부 교전중 잔혹행위가 불가피했던 측면이 있었지만 69년 이후 작전개념이 변경되면서부터는 “베트콩 1백명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지침에 충실했다고 말한다.

 지난 4월20일 한국ㆍ베트남 정부는 양국간 상호이해와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조기 수교가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국교수립의 준비단계로 빠른 시일 안에 서울과 하노이에 연락대표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늦어도 연말까지는 공식국교를 수립한다는 게 양국의 공통된 바람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 오늘과 내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베트남의 자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베트남이 이같은 자세를 견지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민족해방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20여년 전 한국사회에서 월남은 하나의 기회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월남은 이제 결코 기회의 땅이 아니다. 월남의 자세는 겉으로는 분명히 전향적이나 내심으로는 앙금이 없을 수 없다. 한국인들이 베트남에 뿌린 씨앗인 ‘라이 따이한’(한국인 2세)문제를 포함하여 과거를 청산하려는 노력은 이제 우리 몫으로 남아있다.

 

한국군 베트남 파병 일지

55년 10월27일: 한국, 사이공 정부 승인

57년  9월18일: 고 딘 디엠, 한국 공식방문

58년 11월5일: 이승만 대통령, 베트남 답방. 베트남전 참전 의사 표명

61년 11월11~25일: 박정희, 케네디와 면담중 베트남 파병 거론

64년 6월30일: 한국의 비전투군 파병 결정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에 통보

64년 7월20일: 비전투단 증원편성 완료

64년 7월22일: 군파병안 국회에 승인요청

64년 8월2일: 통킹만 위기

64년 9월11일: 1백40명 규모 한국 비전투병력, 부산항 출발

64년 9월14일: 붕타우에 ROKMAG-V 설치

65년 1월8일: 홍정철 공보, 2천 병력 파병계획 공식 발표

65년 1월26일: 한국군 파병안 국회 통과

65년 2월26일: 비둘기 부대 베트남 도착

65년 6월26~28일: 합동참모본부, 1개 사단(수도 사단) 1개 해군여단(제2여단) 포함, 1만    8천5백명 규모 전투군 편성안 완결

65년 8월13일: 야당이 퇴장한 가운데 찬성101, 반대1 기권2로 국회 파병안 통과

65년 10월8일: 청룡부대 캄란만 도착

65년 10월22일: 맹호부대 퀴논 도착

65년 11월29일: 이동원 외무, 제20회 유엔총회 참석, 러스크와 한국군 추가 파병 논의

66년 3월20일: 국회 추가 파병안 통과

66년 3월22일: 혜산진부대 파병

99년 8월9일: 백마부대 1진 닌호아 도착

66년 10월21일: 박정희 대통령, 베트남 방문

66년 11월11일: 박정희 대통령, 추가 파병 희망 공식 발표

68년 5월27일: 한ㆍ미 첫 안보정례회의(SCM)

69년 5월27~30일: 티우, 서울 방문

69년 6월8일: 닉슨과 티우 미드웨이에서 회담. 닉슨은 2만5천 병력 철수 발표

69년 7월25일: 괌에서 닉슨 독트린 발표

69년 9월16일: 닉슨, 3만5천 병력 2차철수 발표

69년 12월15일: 닉슨, 5만명 철수 발표

69년 12월18일: 태국 철군계획 발표

70년 2월15일: 최규하 외무, 한국은 철군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발표

70년 3월20일: 닉슨, 2개 주한미군 포병사단중 1개를 철수시킨다는 안 발표

70년 4월20일: 닉슨, 15만 병력 철수 발표

70년 8월4일: 새 총리 트란 티엠 키엠 서울 방문

71년 1월11일: 박정희 대통령, 연두연설에서 철군 가능성 처음 언급

71년 9월9일: 유재홍 국방, 베트남 주둔 4만8천 병력 철수 발표

71년 11월12일: 닉슨, 4만5천 병력 추가 철수, 지상공격 종료 발표

71년 12월10일: <뉴욕타임스> 미국이 한국군 주둔기간을 더 연장할 것을 요구했다고 보도

72년 2월8일: 유재흥 국방, 사이공에서 티우 만남. 티우는 73년말까지 병력 주둔 요청

72년 7월4일: 청룡부대 철군 완료

72년 11월2~8일: 사이공 공군력 보강 위해 한국 F-5A 전투기 요구받음

72년 11월8일: 한국군, 후방기지로 철수

73년 1월24일: 박정희 대통령, 베트남 정전 환영 요지 특별연설

73년 1월27일: 파리에서 평화협정 조인

73년 3월23일: 한국군 3만8천명 철군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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