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G중독은 틀림없는 직업병
  •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2.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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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고야 만다는 신념으로 우라나라 택시기사들에게는 분명히 LPG중독증이란 직업병이 있음을 저는 제 남편의 경우를 들어 역사에 남기기로 결정했습니다.”

 평범한 한 가정주부가 어느날 갑자가 LPG중독으로 쓰러진 남편을 부여안고 각계에 직업병 인정을 호소하면 다짐했던 말이다. 그리고 2년여의 온갖 고초 끝에 그는 부산고등법원에 낸 소송에서 기어코 그것을 이루어내고야 말았다. 지난해 12월 27일의 일로, LPG중독증이 직업병의 사전에 오르게 된 세계 최초의 사례였다.

 그의 이름은 권정시씨(44). 부산 대원택시 기사로 일하던 남편 강균대씨가 지난  89년 11월 LPG 중독으로 쓰러진 후 2년 남짓의 법정투쟁 끝에 승소한 소감을 그는 이렇게 밝힌다.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승소하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격려해준 모든 택시기사분들과 양심적인 의료진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제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LPG중독을 겪은 기사분들에게 내가 필요한 이를 해줘야지요.”

 그는 그 ‘필요한 일’을 위해 지난 2월22일 조그마한 사무실을 마련했다. 부산시 당리동 사하구청 맞은편에 자리한 ‘함께 만드는 건강한 일터연구소’가 바로 그곳이다. 그는 두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최근 노동계 소식을 담은 각종 자료와 법령집을 갖춰놓고 전국 각지에서 걸려오는 LPG중독 상담전화를 받느라 여념이 없다. “그동안 LPG중독을 직업병으로 판정받기 위해 뛰다보니 누구든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는 것이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하는 권씨는 이제 전국의 택시노동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경험을 ‘따뜻한 말’로 안겨줄 생각뿐이다.

 권씨가 승소한 내용이 세계적으로 최초의 사례였던 만큼 지난 2년 동안 권씨가 헤쳐온 길도 예사롭지는 않았다. 10여 차례에 걸쳐 노동부 부산시 등을 상대로 진정서를 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번번이 “그동안 LPG중독의 사례가 없으며 직업병으로 인정받은 전례도 없다”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병상에 누운 남편이 해고되자 생계마저 감당해야 하는 짐을 진 권씨는 밤낮으로 택시기사들과 양심적인 의료진을 찾아다녔다. ‘민주양말아줌마’라는 별명이 붙여진 것도 바로 이때였다. 권씨는 회사와 노동부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 소송기금 및 생계비 마련을 위해 양말을 싸들고 각지의 택시기사들을 찾아다니는 한편 LPG중독증의 의학적 뒷받침을 받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눈물겨운 노력은 결국 완강하게만 보이던 제도적 벽을 움직이는데 성공했다. 부산고법은 권씨가 제출한 소송을 이유있다고 받아들이고 “LPG중독은 운전기사들의 직업병으로 보아야 한다”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 권씨가 지난 2년 동안 LPG중독 직업병 인정을 위해 뛰어온 눈물겨운 사연은 지난해 10월 엮어낸 수기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기에>에 자세하게 담겨 있다.

 아직은 의사들도 LPG증세 진단을 기피하는 추세라고 말하는 권씨는 고통받는 택시기사들이 모여야 완전한 직업병 판정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힘줘 말한다. 현재 권씨는 근무중 원인모르게 사망한 택시기사들의 경우 LPG중독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유족들이 연구소에 연락해 함께 진상을 규명해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전화:051-208-2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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