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더 솔직하고 떳떳할 수 없을까
  • 박권상(편집고문) ()
  • 승인 1992.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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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갖추기 자유경선'과 추악한 내분 그만두고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경쟁해야 국력 낭비민심 혼란 막는다.


1980년 7월 말,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위컴 대장은 한국의 국민성을 가리켜 레밍(북극산 들쥐) 같다고 비꼬아 한국사람의 분노를 푹발시킨 일이있다. 레밍의 특성은 강한 자에 다투어 몰려가는 데 있다.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씨였으나, 권력은 사실상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전두환 장군과 그의 군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미 광주에서 군부집권에 저항하는 수백명의 시민을 사살하고 수천명의 정치인과 민주 인사를 잡아 가두고 수많은 사람을 직장으로부터 쫓아내고 있었다. 잔인하고 처절한 하루하루였다. 그런 판국에 미국군 사령관은 "이제 전두환씨가 대통령으로 올라서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수많은 한국인이 전두환 뒤에 줄을 서서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적시해 한국인의 '들쥐'심리를 비꼰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모독적인 발언이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양심과 정의 편에 서서 싸우다 목숨을 버리고 감옥에 가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던가. 그러나 그의 말이 전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정치인 경제인 학자언론인 문인이 다투어 군부독재 쪽에 몰려갔던가. 그들이야말로 위컴 장군이 경멸한 '들쥐' 생리의 소유자들이었다. 눈치빠르고 약삭빠르고 줄 잘서는 데 틀림없는 사람들이었다.

전장군의 '제5공화국'이 성립됐을 때 바로 그들이 중심되어 만든 것이 민주정의당이라는 정치집단이었다. 민정당은 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분열의 덕택으로 신승했으나, 88년 총선거에서는 '군정 종식'을 공약한 평민당 민주당 공화당 등 범야권에 일패도지, '여소야대'라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삼권분립에 입각한 의회 민주주의가 살아나는 듯하였다.

 

부정선거 시비 뒤집고 대권경쟁 굳힌 묘기 연출

그러나 얼마 안가 노태우 대통령은 민주공화 양당을 흡수해 민자당을 만듦으로써 선거로 표출된 국민의 심판을 정면으로 거역하였다. 3당 합당 2년 반, 정치는 여권의 대권경쟁으로 바람잘 날 없이 '진흙탕 속 개싸움'의 연속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과 불확실 속에 경제가 날로 어려워지고 사회불안이 가중되었다. 1백억달러 흑자에서 1백억달러 적자로 돌아선 무역수지가 이를 단적으로 말한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민자당은 324 총선에서 참패하였다. 과반수에서 한두자리 모자라는 것이 어찌 '참패'로 묘사될 수 있느냐고 반박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석 4분의 3을 차지한 제13대 국회와 비교하거나, 이번 선거가 돈 조직 선전 정보 관권 등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금권 및 관련 선거임을 고려할 때 민자당의 참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민자당 정부는 특히 군부재자 부정선거, 안기부의 선거개입 등 굵직한 선거부정에 전혀 반성하는 조처 없이 곧바로 대통령후보 경쟁에 들어감으로써 일거에 부정선거 시비에서 '대권' 경쟁으로 국민의 시선을 돌려버리는 묘기를 보였다.

 

자유 경선 원천봉쇄하고도 '엄정한 관리자'라니

해괴한 것은 '자유 경선'이라는 이름의 모양갖추기다. 아무리 보아도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 대표를 대권후보로 작심한 것이 분명하다. 민자당 내에서 압도적으로 수가 많은 민정계의 대표 박태준 최고위원을 불러 후보대열에서 탈락시킨 것이 누구인가. 노대통령 스스로 박씨의 출마포기를 종용했고 안기부장이 만일 박씨가 끝내 출마한다면 '항명'으로 간주하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 지상에 공공연하게 발표되지 않았던가.

또 민자당 대표와 국회의장까지 지낸 당의 원로도 '외압'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김영삼씨와 호흡을 같이 하지 않았던 공화계의 김종필 최고위원도 어느날엔가 노대통령과 만난 후에 김영삼씨를 후보로 추대하기로 결심했다고 보도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른바 '盧心'이 어디에 있다는 것은 명명백백한데, 들쥐 체질의 사람들 대다수가 민정계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순식간에 강한 편에 줄서는 게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종찬 후보 진영이 '외압'을 불평하고 '모양갖추기' 경선 포기 운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정치사상 해바라기성 심리가 곧 여권의 생리라면, 어떻게 했든 '노심'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은 김영삼씨의 탁월한 정치적 수완이다.

다만 꼴사나운 것은 아직도 '자유 경선'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현혹시키고, 당 교육원 매각사건 폭로에서처럼 스스로 추악한 내부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왜 노대통령은 좀더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김대표의 손을 들어줄 수 없었을까. 왜 박최고위원 강제탈락 등 자유경선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가운데 아직도 '엄정하고 공정한 관리자' 운운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로 신비에 싸인 수수께끼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때이른 대권경쟁과 불필요한 묘기 때문에 민자당의 지지표가 우수수 떨어질 뿐아니라 민심이 혼탁해지고 국력이 소모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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