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西가 검찰공화국 불렀다”
  • 이흥환.박성준 기자 ()
  • 승인 1991.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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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자금 수수 의혹 등으로 정계 휘청…新권력층과 검찰 밀착, 의회 역할 축소돼

■택지특별공급 과정 : 검찰의 수사결과에 따르면 1988년 1월 주택조합측의 요청으로 한보주택이 3만5천5백평을 매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수서사건의 발단은 땅을 사려 했던 주택조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88년 1월에는 25개 조합 중 어느 한 곳도 조합설립이 안돼있는 상태였다. 또 한보는 공여개발에 의한 택지개발 예정지구 지정(89년 3월 21일) 이후에도 계속 땅을 사들였다. 자연녹지가 택지로 변경될 가능성을 읽고 녹지를 사들였다는 검찰의 발표와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12개 주택조합이 추후로 설립인가를 받은 것도 지구지정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한보가 당초부터 택지특별공급을 겨냥, 이를 위해 주택조합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냐 하는 지적은 당시 한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 張炳朝 전 비서관의 ‘1인극’인가 : 2월 3일 청와대의 민원이첩 공문이 평민당 공문과 함께 공개도면서 수서의 불길은 순식간에 정치권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청와대쪽 관련자로 장병조 전 비서관의 이름이 거명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검찰의 발표대로라면 한보 鄭泰守 회장은 수서택지 특별공급을 위해 장씨에게 가장 먼저 로비의 손길을 뻗쳤고, 장비서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서택지 특별공급에 관계했다.

검찰의 발표대로라면 장병조씨가 소속돼 있는 청와대에서는 특별공급과 관련해 직접적인 어떤 지시도 내린 바 없고 지원도 없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1급 비서관 혼자의 힘으로 서울시와 건설부 등 관계기관장과 민자당에까지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번 사건에서 화제가 되었던 인물 중의 하나가 바로 장병조 전 비서관이다. 그는 82년 체육부 창설 당시(초대 장관 노태우)부터 盧泰愚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고, 노대통령 집안의 집사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여서 그의 배후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다.

■ 한보 비자금 3백억원 : 과거 명성사건과 범양사건 때 국세청은 즉각 세무사찰을 한 바 있다. 감사원은 한보그룹의 탈세와 탈법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국세청은 탈세사실만 조사했을 뿐 전면적인 세무조사는 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번 사건의 핵심이랄수 있는 한보의 비자금 조성 방법이나 규모에 대해서는 어느 기관도 손을 대지 않았다.

한보의 로비자금 규모는 대략 3백억원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보는 수서땅을 조합에 넘기면서 3백36억원을 받았다. 이 3백36억원은 수서와 관련된 자금일 뿐이며 정회장이 운용하는 한보그룹 전체의 비자금에 대해서는 설만 무성할 뿐이다. 검찰이 발표한 정회장의 로비자금은 11억9천만원이다. 따라서 3백36억원 중 11억9천만원의 행방만 밝혀졌을 뿐 나머지 2백90억원에 대한 구체적인 사용처는 묘연한 상태다.

게다가 정회장의 비자금을 관리해온 것으로 알려진 경리직원 천은주(24)씨의 소재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고, 천씨를 찾는다 해도 이른바 ‘비밀장부’가 보관되어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한보의 비자금 부분은 당분간 오리무중일 수밖에 없다.

■ 김운환 의원 발언 내막 : 2월6일 민자당 김운환 의원의 “金鍾仁 경제수석 개입의혹” 발언은 타오르는 수서사건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으나 발언 당사자인 김의원이 번복함으로써 유야무야 됐다. 하지만 청와대를 건드린 김의원의 발언경위와 진의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김운환 의원이 金泳三 대표최고위원의 직계라는 점을 들어 김대표를 정점으로 한 민주계의 반격설이 나돈 것이다. 그러나 김위원의 발언이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실수’였음이 밝혀지면서 수서사건을 민자당내 계파싸움으로 파악하는 시각은 움츠러들었다.

■ 평민당 관련 부분 : 이번 사건에서 평민당은 ‘역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金治植 총재비서실장이 구속되었을 때 평민당은 “검찰이 평민당 안방 문턱에서 어슬렁거린다”면서 경계태세에 들어갔고, 김총재의 ‘분신’으로 일컬어지는 權魯甲 의원에게까지 검찰의 손길이 미치자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내심 “이제는 안방으로 들어왔다”면서 바짝 긴장했던 것이 사실이다. 야당총재의 숨통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자금줄이 검찰에 의해 건드려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검찰 주변과 정가 일부에서는 평민당과 검찰 사이에 모종의 묵계가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당초 검찰에서는 평민당의 정치자금까지 건드릴 의도가 없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평민당이 청와대 관련 의혹을 계속 걸고넘어지자 일부 수사관들이 “평민당도 깨끗한 것은 아니다”라고 언론에 흘렸고, 언론의 취재경쟁 때문에 마지못해 검찰이 권의원을 소환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수세에 몰렸던 평민당이 ‘역공’의 계기를 잡은 것은 민자당 당정회의록 메모를 공개 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평민당은 강공을 취하지 않았고 김총재의 기자회견을 통해 ‘사태수습’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민주당이나 민중당이 청와대를 향해 맹공을 퍼붓는 것과는 대조적인 자세다.

■ 민자당 당정회의록 메모 공개 : 민자당의 제2차 당정회의록(90년 8월17일)메모내용이 <ㅈ일보>에 공개되고 평민당이 바로 사본을 공개하자 정치권은 다시 한번 발칵 뒤집혔다. 이번에는 민자당의 정치자금줄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徐淸源 의원의 자금수수설도 한몫 거들기에 충분한 사안이었다.

더구나 노대통령이 대국민사과 특별담화문을 발표한 지 이틀만에 터져나온 회의록 메모는, 청와대를 거론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여권을 벌집쑤시듯 해놓았다. 평민당 李海瓚 의원은 당정회의록 메모를 “수서사건에 대한 판결문” 이라고 비유했다. 이의원은 또 “6공화국의 내부갈등을 입증해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말하면서 일종의 ‘내부 쿠데타’ 같은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문제의 회의록 메모를 작성한 사람은 당정회의에 참석했던 건설부의 李東晟 주택국장. 그는 지난 2월11일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고 풀려난 뒤 이튿날 이화여대부속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사실 때문에 검찰에서 구타당한 것이 아니냐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당사자이다.

이국장은 자신의 메모 사본이 공개되자 “감사원과 검찰에 제출했던 메모”라고 작성 사실을 시인했으나, 평민당에 건넨 일은 없다고 부인했다. 메모 사본을 공개한 평민당의 朴相千 대변인은 “입수 경위는 중요하지 않다”면서 “최고 수사기관인 검찰과 최고감사기관인 감사원이 이미 이 메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끝간데없이 확산일로를 걷고 있는 이 사건의 종착점을 야권에서 점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즉 서청원 의원의 문서변조 사실과 장기욱 전 의원의 폭로내용, 그리고 한보건설 경리담당인 천은주씨의 잠적이라는 3가지 사실은 같은 맥락에 있으며, 천씨를 찾아내 경리장부의 수표를 추적해 비자금 관련 부분을 밝히면 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날 전모가 드러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 것이다. 또 입각이 유력했던 김용환 의원이 2ㆍ18문책 개각 때 빠진 것은 당정회의를 주재했던 사실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는 추측이 나돌기도 했다.

■ 마무리 : 정치권 일부에서는 이번 사건을 ‘자연폭발’로 보고 있다. 평민당 김총재의 한 측근은 수서사건을 “떠돌아 다니는 빙산”이라고 비유한다. 언제 어디에 가서 부딪힐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들은 이 사건의 ‘종착점’이 어디인가를 궁금해한다. 한 정치학 교수는 이번 사건의 결과에 대해 “6공화국이 ‘검찰공화국’이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新권력층과 검찰이 밀착하고 있다는 것이며 더불어 의회의 역할이 축소되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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