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을 ‘성장의 바퀴’
  • 김재일 경재부차장 ()
  • 승인 1991.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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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珏圭 신임주총리 “금융실명제 등 경제개혁 생각없다”…부분적 변화는 있을 듯

“경륜의 정통 경제관료” “지난 시대의 인물” 등 엇갈린 평가 속에 崔珏圭 신임 부총리가 등장했다. 지난 2월19일 오후2시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는 신임 부총리의 취임식이 열렸다. 취임식에 참석한 3백여명의 사무관급 이상 기획원 직원들은 대체로 밝은 표정이었다. 한 직원은 “아직까지 기획원 업무를 잘 모르는 사람이 부총리를 맡아 리허설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한 경우가 많았다. 기획원 차관을 지낸 신임 부총리는 그런 연습이 필요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취임을 환영한다”라고 말했다.

다른 한 직원은 새 부총리 취임을 李承潤 전임 부총리 취임 때의 인상과 비교한다. “전임 부총리에 대해 기획원의 분위기는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그가 취임하기 전부터 토지공개념 금융실명제 등 개혁입법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대입장을 취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또 이 부총리가 재임기간중 현안 해결뿐만 아니라 경제팀장으로서의 운신에 있어서도 실패했다고 단정한다.

“부총리는 자기만 바삐 움직인다고 되는 자리가 아니다. 실력뿐만 아니라 인격까지 겸비한 한 나라 경제의 상징적인 존재여야 한다. 전임 부총리 재임시 경제정책의 홍보 수요가 많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자신이 없고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증거다”라고 혹평했다.
이처럼 전임자와의 상대 비교에 따른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최부총리는 국가 경제의 총책을 맡았다. 그러나 ‘뭔가 새로운 것’을 바라는 일반의 기대와는 달리 경제정책 기조는 예전과 다름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최부총리 또한 취임사에서 “전임자가 세운 정책을 꾸준히 끌고나가는 데 주안점을 두겠다”고 함으로써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이 시점에서는 정책 자체의 잘못보다는 행동을 통해 일관성 있게 시책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중소기업 육성과 농업 구조조정에 큰 관심
그는 금융실명제 등 경제개혁 조처에 대해 “전임자 시절 정부 방침이 확정됐으므로 새롭게 재검토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박정희 경제학교의 모범생’ ‘남덕우 스쿨의 우등생’인 최부총리의 취임은 이승윤 부총리에 이은 또 다른 성장론자의 등장을 의미한다.
다만 최부총리의 개인적인 성향ㆍ관심분야와 관련해 부분적인 정책의 변화가 예상된다. 그는 경제장관들이 ‘단일 티킷’임을 강조하면서 경제부처를 장악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재무부 상공부 농림수산부 교통부 장관은 지난날 그와 행정부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다. 강한 소신과 추진력을 가진 그가 경제팀의 팀웍을 이뤄낸다면 부분적이나마 현안의 해결과 개혁을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일반의 희망 섞인 기대이기도 하다.

최부총리는 한국 경제의 최우선 과제로 물가안정을 꼽는다. 그는 최근 경제차관회의에 이례적으로 참석해 “주무부처별로 소관품목의 물가안정을 책임지지 못하면 시범적으로 몇 사람 잘라버리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또 조세ㆍ금융제재 등 정부의 직접통제 강화와 토지거래허가제 확대를 통해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경계할 뿐만 아니라 “상공부는 이제 중소기업부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중소기업의 육성을 강하게 주장해왔다.

그는 농업 구조조정에 관한 한 혁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농토 값이 폭락하는 현상에 대해 개탄하면서 농민들이 농토를 재산가치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과감하게 ‘절대농지’를 풀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해왔다. 이러한 소신에 비추어 앞으로 부문별 정책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다.

최부총리는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 서당골에서 병원장과 명륜고등학교 이사장을 역임한 崔燉重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이던 56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 그해 재무부에서 공직을 시작하면서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렸다.

재계에선 수출에 기대 걸며 환영
그는 61년 경제기획원이 창설되면서 투자예산과장을 맡아 기획원과 인연을 맺었다. 그후 재무부로 돌아가 국고국장 기획관리실장 차관보 차관을 지냈고 74년 차관으로 기획원에 다시 돌아왔다.

42세 때인 75년에 농수산부장관에 발탁되고 그 2년 후에는 상공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79년 10ㆍ26 사태로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그후 7년간 한국비료공업 한양화학 경인에너지이 사장을 차례로 맡아 실물경제 경험을 쌓았다.

‘인간 컴퓨터’ ‘면도날’ ‘똘똘이’ 등 다양한 별명으로 불리는 최부총리는 관운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가 농수산부장관으로 재직했던 2년간은 계속 풍년이었는데 77년에는 4천2백만섬이라는 한국 농정사상 최대의 풍작을 기록했다. 후임 張德鎭 장관이 소위 ‘노풍 피해’로 취임 1년만에 도중하차한 것과 비교된다. 농수산장관직은 그만큼 “하늘이 도와주어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또 앞에서 예로 들었듯이 그는 곧잘 전임자와 비교되어 반사이익을 얻기도 한다. 농수산부 관리들은 ‘파쇼형’으로 부하들의 원성을 샀던 정소영 전임 농수산부 장관과 대조하여 최부총리를 “밑의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뿐 아니라 설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극심한 여름 가뭄 끝에 비가 내리자 박대통령은 한밤중에 최장관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단둘이서 비를 맞으며 막걸리를 마신 일화가 있을 정도로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역대 농수산부 장관 38명 중 2년 이상 재임한 사람은 아직까지 6명에 불과하며 퇴임 후 다른 부처의 장관으로 영전한 기록은 최장관의 경우가 유일하다. 상공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직후인 77년 12월에 그는 축제분위기 속에서 수출 1백억달러 달성을 기념하는 ‘수출의 날’ 행사를 주관하는 행운을 안기도 했다.

최부총리는 민자당의 전임 정책위의장이었던 金龍煥 의원과 절친한 사이다. 두 사람은 고시 동기로 사무관 시절 미국에 유학, 1년 동안 함께 자취하면서 동고동락했다. 그는 상공장관 재직시 대통령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의 인사 청탁을 단호히 배격할 정도로 뚜렷한 소신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시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강릉에서 출마해 민정당의 이봉모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당시 최후보가 획득한 유효투표의 64%는 여당 성향이 강한 강원도에서 사상 유례없는 득표였다.

최부총리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펼친 장본인이다. 재계는 탈진한 수출에 생기를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의 취임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노동계에선 ‘착취 선봉정’이라며 반감
그러나 지금은 국내외 경제 여건이 그가 활약하던 60~70년대와는 현격하게 달라졌다. 국제화에 발맞춰 국내시장을 완전히 개방하라는 대외적인 압력이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당시에는 문제되지 않던 노사문제가 지금은 경제의 향방을 결정하는 주요 변수로 떠올랐다. 전노협의 李鎔範 홍보부장은 “최부총리는 수출 드라이브의 선봉장이었다. 이는 그만큼 노동자의 피와 담을 착취했다는 것을 뜻한다”며 그에 대한 반감을 내보인다.

농정만 해도 지금은 과잉생산으로 인해 남아도는 쌀의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썩혀야 하는 시기다. 정부주도의 경제정책이 오직 성장을 향해 초점이 맞춰졌던 당시와 비교, 지금은 분배균형 등 경제정의 문제에 많은 국민들이 눈을 떴다. 더욱이 정치의 불안정과 정책의 일관성 결여로 인한 국민의 불신은 우리 경제의 가장 심각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부총리는 취임사에서 “우리 경제는 가히 80년대 초에 비교할 만한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고 말했다. 물가앙등 수출부진 노사문제 우루과이라운드 대책 등이 얽히고 설킨 경제난국을 그는 잘 헤쳐나갈 것인가.

11년만에 정부에 돌아온 최부총리의 ‘마지막 봉사’는 어떤 길을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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