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맘에 달린 기업 生死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1.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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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죽음’, 한보 ‘삶’ 대조적…재계ㆍ권력 유착 구조화

건설회사 수주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의 근무처는 건설부와 시ㆍ군청 조달청 등 발주기관이다. 정부의 공사 발주계획 냄새를 사냥개처럼 맡는 것이 이들의 가장 중요한 업무이다. 공사계획이 확정되면 상상을 초월한 첩보전이 벌어진다. 예정가 탐색전이다. 경쟁업체를 '물먹이려는‘ 역정보도 난무한다. 발주기관의 근처 음식점이나 사우나 등에서는 업자와 공무원과의 은밀한 접촉이 가끔 드러나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다. 큰 일감일수록 남조다 먼저 정보를 빼내는 업체가 유리하다. 그러려면 발주기관의 공무원들과 끊임없이 ’교제‘를 해야 한다. 여기에는 물론 돈이 들어간다. 혈연 학연 지연 등 잡다한 연줄도 총동원된다.

ㅅ건설의 한 임원은 정부발주 대형공사의 경우 “90% 정도는 입찰공고가 나기 전에 이미 업자가 내정돼 있다고 봐야한다”고 밝힌다. 낙찰방법이야 어떻든 사전에 발주기관과 권력핵심부에 연을 맺어놓은 업자가 가로채고 있다는 것이다. 건설업계에서는 이런 행위에 대해 ‘편지를 띄운다’는 은어를 쓰고 있는데, 여기에는 웬만하면 끼어들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돼 있다고 한다. 건드려봐야 내몫이 안되고 거기에 혹여 권력핵심부와 단단한 끈이 있을 경우 미움만 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핵심부의 연이 누구냐, 어떤 로비스트를 내세워 일을 추진했는가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다고 한 관계자는 귀띔한다. 이 업자보다 더 강력한 로비스트를 동원할 경우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5공 때 이런 일이 벌어져 ‘막판뒤집기’에 성공한 기업들이 여럿 있다고 전한다.

한보그룹 鄭泰守 회장도 애용한 수법이지만 아예 이런 경쟁도 없이 공사를 따는 경우도 있다. 수의계약 공사를 얻는 것이다. 경쟁이나 입찰방법에 의하지 않고 특정업체를 지명해 계약을 맺는 수의계약은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하자가 없다. 예산회계법시행령(1백12조1항)을 보면 수의계약을 할 수 있는 경우가 24가지나 된다. 여기다 계속공사 연고권공사 등을 더하면 수의계약은 공무원의 해석에 따른 재량권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관계공무원과 업자가 결탁할 때 조항은 걸기만 하면 돼 수의계약공사는 ‘만든다’고 표현된다.

이런 거래일수록 악취를 풍기게 된다. 뇌물이 오가고 계약 전부터 정치자금 비율이 아예 정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서울시의 경우 지난 86년부터 88년까지 발주한 5억원 이상 공사는 총 3백10여건에 6천7백억원이었는데 이중 수의계약이 1백93건으로 62%에 달했다. 수의계약 1위 업체는 10건에 3백62억원을 따낸 한보였다.

전 국제그룹 회장 “로비 못한 게 죄”
한보그룹의 앞날은 ‘살리기’쪽으로 결정나고 있다. 은행관리나 법정관리로 인한 제3자 인수 등이 논의되던 한보의 장래가 검찰의 사건발표 직전 돌변한 것이다. 조흥은행 등 한보 관련 은행들은 부도를 막기 위해 추가지원을 계속하고 필요하면 한국은행에 추가지원을 요청하겠다고 ‘후하게’ 나왔다.

한보의 운명에 대해서는 과거 물의를 일으킨 기업이나 부실기업 정리 때도 그랬지만 ‘정치적 결정’만 남았다는 말이 떠돌아 다녔다. 한보의 구제는 이해당사자인 은행의 자율적 의사라기보다는 드러나지 않는 권력자나 기관이 배후조정을 한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시각이다.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정부가 쥐고 있다는 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나같은 시골사람은 정치적으로 잘 하지 못했고 또 로비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어요. 어떤 사람은 위급할 때면 즉시 정부에 찾아가 살려달라고 한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로비 못한 게 죄라면 죄지요.” 하루아침에 국제그룹이 공중분해돼 몰락기업주가 된 지 深正模 전회장은 이렇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청와대와 ㅈ씨 등 정치실력자들에게 밉게 보인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 국제그룹이 ‘정치적 타살’을 당했다고 믿고 있다. 당시 국제그룹은 재계 순위 8위에 있었으나 부채비율이 9백14%(양회장측은 8백70%라고 주장)나 되는 등 재무구조가 나빴다. 정리대상에 오를 수는 있었으나 국제의 처리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단자 등 제2금융권의 상환압력이 일시에 몰려들어 주거래은행에서 회복 불가능이라고 판단하는 경우에도 해당그룹과 상의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즉각적으로 부도처리를 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점이었다. 자구노력에 의한 사전 자금지원 요청을 외면하고 부도처리를 한 후에 즉시 지원한 이유도 매끄럽지 않다. 이 두가지는 한보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데 정부는 부도를 내지 않았으며, 살려달라는 鄭譜根 부회장에게 鄭永儀 재무장관은 “자구노력을 먼저 하라”며 숨통을 틀어막지는 않았다.

86년 이후 부실기업 정리에서도 의혹은 꼬리를 물었다. 정리된 기업, 이를 인수한 기업, 살려준 기업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고 몇몇 권력자가 ‘안가에서 떡먹듯 자른’ 이른바 밀실에서 단행되었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기준이 있었다면 권력에 잘 보인 기업은 설사 부실 정도가 심하다 해도 살려주고 같은 조건이더라도 밉게 보이면 재계에서 사라져야 했다”고 단정한다. 또 일부 곱게 보인 기업에게는 부실기업을 파격적인 조건으로 인수하게 하여 성장가도를 달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80년대 재계판도는 엄청나게 변했다. 이는 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의 <우리 기업의 성장추이 몇 규모변동 요인분석>이란 보고서에서 잘 드러난다. 총자산규모를 기준으로 77년도의 상위 30개 대기업(제조업)중 88년에는 18개 기업만이 살아남아 있다. 순위도 크게 바뀌어 77년에 1위였던 기업이 10년이 지난 후엔 6위로 떨어졌고 3위기업은 30위 밖으로 밀려났다. 이 보고서 작성자인 姜信逸 연구위원은 “성공한 기업들은 산업구조조정 등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했고 발빠른 신제품전략을 세웠다”고 진단하고 있으나 부실기업 정리 등 정치적 바람에서 줄타기를 잘 한 요인이 보다 결정적이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정치바람에 줄타기 잘 해야 성공” 지적도
정부가 미운 기업을 엄히 ‘다스릴 때’ 쓰는 수단이 세무사찰 세무조사 여신규제 등이다. 세무사찰을 받고 단칼에 없어진 명성그룹도 권력에 밉보여 당한 기업으로 꼽힌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세무사찰이나 여신규제로 죽이겠다고 다리를 걸어오면 버틸 재간이 없다”고 호소한다. 당하지 않기 위해 기업들은 끊임없이 정부의 일거수일투족에 안테나를 높이 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재계는 정치권력과의 유착장치를 구조화할 것을 꾀한다. 여전히 영향력있는 퇴임권력자를 재벌의 직접적 통제범위인 기업체내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대기업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정경유착 메커니즘(T-Y-Z 콤플렉스)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방법은 혼맥형성이다. 재벌들은 전ㆍ현직대통령 국무총리 부총리 장ㆍ차관 및 국회의원들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는데 서로 거미줄 같은 망을 형성, 유착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큰 이권을 노려, 성장의 기회를 잡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하더라도 권력과의 유착관계는 불가피하다. 아주 경미한 하자를 꼬투리로 제품생산 중지명령을 받은 경험이 있다는 한 사장은 “권력핵심부가 아니더라도 사업을 차질없이 계속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해당부처의 관리들을 잘 접대해놓아야 한다”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또 정부가 인허가를 많이 풀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인허가권을 틀어쥐고 손을 벌린다고 성토한다. 동아대 박영수 교수(경제학)는 “관료들의 부패는 지하경제를 점점 부풀리는데 크게 기여해 사회안정을 해치고 있다”고 우려한다.

70년대말만 해도 내노라하는 재벌의 총수가 경제부처를 기웃거리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이들의 발길을 정부내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정경유착의 심화 정도가 그나마 개선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유착양상이 지능화하는 것이고 비밀통로가 더욱 깊어지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개선쪽이라고 보더라도 아직은 멀었다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다.

≪뇌물경제학≫을 쓴 게리 베커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극대화를 위해 적발되어 체벌을 당하는 선을 넘지 않는 지점까지는 일을 도모하려 한다. 이에 동반하는 것이 뇌물이라면 이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교통법규 위반으로 3만원자리 스티커를 받을 때 위반자는 1만원을 교통경찰관에게 주어 모면할 수 있으면 이를 선택하고, 교통경찰관도 자기몫인 1만원이 스티커를 발부하는 것보다 이익일 수 있다. 이런 단기적인 이익을 앞세우다보면 부패의 먹이사슬은 더욱 촘촘해질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 보면 부패는 인플레와 같다. 모두에게 무차별적인 해악으로 다가온다. 다른 부문이 모두 썩어 있는데 공직자만 도덕군자가 되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만, 제도와 규범을 만들고 그것으로 다스려야 할 세력부터 깨끗해져야 함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우리는 잠롱과 막사이사이 같은 청백리를 갖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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