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경제 공룡’ 수술한다
  • 워싱턴 · 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6.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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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개혁 본격 시동…미국 무역 적자 해결·투표권 재조정이 ‘핵심 과제’

 
“오늘날 국제통화기금(IMF)은 깊은 잠에 빠져 있거나 잠에서 아직 덜 깬 상태다. 한마디로 방향감을 잃어버린 기관이나 다름없다”

전세계 금융인의 존경을 두루 받는다는 머빈 킹 영국은행 총재가 최근 개혁 압력을 거세게 받고 있는 국제통화기금을 두고 지적한 말이다. 1945년 출범 이후 세계 경제 성장의 ‘안전판’ 구실을 해온 국제통화기금이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이런 험악한 얘기가 나오는 것일까.

사실 국제통화기금을 개혁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970년대 이후 최근까지 100여 건의 크고 작은 각종 경제 위기가 발생했지만 국제통화기금이 제때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1997년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를 강타한 초대형 외환 금융 위기의 경우 이를 사전에 감지해 예방적 조처를 취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태 발생 뒤에도 까다로운 조건부 구제 금융을 실시해 오히려 해당 국가의 경제 회복을 지연시켰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이처럼 오랜 세월 개혁론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온 국제통화기금이 올해에는 말뿐인 개혁이 아닌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을 것 같다. 현재 개혁의 총대를 맨 사람은 스페인의 경제 부총리를 지내다 2004년 6월 국제통화기금의 총재에 취임한 로드리고 라토. 라토 총재는 4월22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춘계 회의를 앞두고 잇따라 개혁을 외치고 있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그는 4월 초 미국 하버드 대학 연설과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와 가진 회견 등에서 국제통화기금의 개혁 방향을 내놓았다. 그가 꺼낸 개혁의 골자는 범세계적인 무역 불균형 문제와 일부 회원국들의 투표권 재조정 문제로 압축된다. 라토 총재는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재무장관들에게 자신의 개혁 구상을 내놓아 동의를 받아낸 뒤, 오는 9월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정기 연차총회 때 최종 개혁 실천 방안을 제시한다는 계획이다.
 
우선 라토 총재가 언급한 범세계적인 무역 불균형 문제는 한때 세계 최대의 채권국에서 지금은 채무국으로 전락한 미국의 거대한 무역 적자를 염두에 둔 것이다. 세계 경제의 축을 떠받치고 있는 미국이 지금처럼 천정부지로 무역 적자를 늘릴 경우 언젠가는 세계 경제도 위기가 닥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지난해 미국의 무역 적자 규모는 무려 7천2백58억 달러(약 6백97조원)로, 4년 연속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이 규모는 지난해 미국내 총생산(G에)의 6.5%에 달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과의 무역 적자는 2천20억 달러(약 1백94조원)에 달할 정도로 심각하다. 물론 중국 말고도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산유국들과 대일본 무역 적자도 만만치 않지만 미국 처지에서 볼 때 최대 골칫거리는 역시 중국이다.

미국은 중국이 달러화에 대한 자국의 위안화 환율을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해 결과적으로 교역상의 우위를 누리고 있다며 위안화 환율 절상 압력을 가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는 “본질적으로 세계 무역이 불균형을 빚고 있는 핵심은 미국과 중국간 교역 불균형에서 비롯했다”라고 지적했다.
 
 
라토 총재가 국제통화기금의 개혁과 관련해 유념하는 대목도 바로 중국처럼, 환율을 시장의 자율 기능에 맡기지 않고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나라들에 대한 대처 방안에 맞추어져 있다. 라토 총재는 이번 워싱턴 춘계 회의에서 범세계적 무역 불균형 문제를 분석해 회원국들에게 적절한 해소책을 제시하도록 하는 ‘다자적인 감시’ 기능을 국제통화기금에 부여하도록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그는 지난 4월6일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각국 재무장관들이 이번 춘계회의에서 합의한다면 곧바로 다자적인 감시 기능이 발동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이해 당사국인 중국이 순순히 응해줄지 의문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지금 같은 미국의 초대형 무역 적자가 세계 경제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대체로 동의하는 쪽이다. 외국 투자자들이 어느날 갑자기 달러화의 매력을 잃고 대미 투자를 중단할 경우 달러 가치는 폭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달러 가치의 폭락은 곧바로 투자 유입을 끌어내기 위한 금리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미국 내 수요가 위축되고 그로 인해 세계 경제 성장에도 악영향을 주는 등 연쇄적인 파급 효과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라토 총재도 이를 염두에 둔 듯 “미국의 천문학적인 무역 적자로 촉발된 범세계적 수준의 무역 불균형이 폭발하면 세계 금융 질서가 교란되는 것은 물론 세계 경기의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 현재 세계 경제가 좋긴 하지만 미국의 거대한 무역 적자라는 취약한 기반 위에 서있다”라고 경고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미국의 무역 적자에서 비롯된 세계 무역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중국 못지 않게 엄청난 대미 흑자를 기록해온 유럽과 일본이 내수 진작을 통해 미국산 물품을 구입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투표권 재조정 문제는 쉽게 타결 안될 듯

라토 총재가 내세운 또 다른 개혁 과제는 국제통화기금 1백84개 회원국의 투표권 재조정 문제다. 그는 회원국의 경제 규모와 재정 기여도를 감안해, 중국처럼 급성장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의 경우 경제 규모에 걸맞게 투표권을 확대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투표권 확대 후보국을 구체적으로 거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중국·한국·터키를 대표적인 나라로 꼽고 있다. 현재 미국이 17.40%로 가장 많은 투표권을 갖고 있으며, 일본이 6.24%로 그 뒤를 달리고 있다. 반면 한국은 1.63%, 중국도 2.98%에 불과하다. 실례로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의 경우 실제 세계 경제 기여도에 비해 66%나 투표권이 낮게 평가되어 있다고 본다.
 
이와 관련 티모시 애덤스 미국 재무차관은 “현행 투표권은 세계 경제에 대한 여러 나라의 가중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라면서 투표권 재조정에 적극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투표권 재조정 문제는 쉽게 타결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발상이 현실화될 경우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될 유럽 국가들로부터 만만치 않은 저항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라토 총재도 이런 난관을 염두에 둔 듯 “투표권 재조정 문제가 중요하긴 하지만 세계적인 무역 불균형이 해소되는 것이 더 급하다”라며, 개혁 과제의 완급 조절에 나섰다.

현행 규정상 투표권 재조정은 매 5년마다 이뤄지며 1백84개 회원국 가운데 85%가 찬성해야 한다. 오는 2008년 차기 투표권 재조정이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라토 총재가 내세운 범세계적 무역 불균형 해소책과 투표권 재조정 문제와 관련한 개혁 구상이 과거 실천에 옮겨질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크다고 보고 있다. 무엇보다 국제통화기금 최대 주주인 미국이 이런 개혁안이 미국의 국익에 맞다고 보고 적극 동조 의사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3천억 달러(약 2백88조원)가 넘는 대출 능력에 2천6백여 명의 인력을 거느린 국제통화기금은 여전히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거대 국제 기구이다. 이 공룡 기구가 과연 지금보다 더 효율적인 기구로 거듭날 수 있을지에 세계 경제 전문가들의 눈길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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