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코드' 한국도 개발할 수 있었다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2.05.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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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이면우 교수가 '고유번호 예약녹화' 아이디어…경영진 '모험 기피'로 무산


 지난 89년께 대우전자와 공동연구를 수행하던 서울대 李黑雨 교수(산업공학과)는 녹화재생기 (VCR)를 간단히 작동시켜 예약녹화할 수 있는 방식을 개발하려 했다. 무려 8단계나 조작해야 했던 예약녹화 방식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잘 쓰이지 않는 데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이교수는 좀더 편한 가전제품을 원하는 소비자의 잠재욕구를 충족시킬 간편한 예약방식을 개발해 특허를 따내기만 한다면 이 제품은 세계시장을 주름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물론 미국에서 헨리 유엔이 비슷한 아이디어로 'VCR 플러스'라는 획기적인 제품을 개발중이라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기 전의 일이다.


이교수의 아이디어는 협력 가전업체 경영진의 반발로 벽에 부딪혔다. "아이디어는 좋지많, 국내 신문사와 잡지사가 텔레비전 프로그램 안내란에 고유번호를 붙여주는 식의 협조를 하겠느냐"라는 것이었다. 경쟁 회사의 로비도 예상되었다. 그들은 애써 개발한 예약녹화 방식이 언론사의 비협조로 사장된다면 회사로서는 막대한 개발비를 날리게 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교수는 신문사나 잡지사의 협조 없이도 가능한 예약녹화 방식을 생각해냈다. 시청자가 말로 어떤 프로그램을 녹화하라고 명령하기만 하면 예약녹화가 되는 '음성인식 예약녹화 방식'이 그것이다. 이 예약녹화 방식 개발에는 기술진이 반대했다.


"음성인식 기술이 얼마나 어려운데 그렇게 쉽게 제안하느냐"라는 반응이었다. 설령 개발된다 해도 비싼 제조원가 때문에 상업성이 없을 것이란 주장도 나왔다. 결국 그는 타협했다. 화면에 나오는 8개의 예약녹화 요구사항대로 일일이 리모콘으로 입력하는 방식 대신 녹화재생기가 음성으로 요구하는 대로 예약녹화하는 방식을 개발하기로 한 것이다. 이 방식은 거부당한 두 아이디어를 절충한 것으로 당시 기술로 쉽게 개발할 수 있었다. 이 방식은 "녹화할 날짜와 시작 시간을 눌러주십시오, 채널을 알려 주십시오, 또 하시겠습니까"라고 녹화재생기가 차례로 물으면 그때마다 리모콘으로 숫자를 입력하면 된다.


이 예약녹화 방식은 시제품까지 만들었으나 상품화되지 않았다. 상업성이 없을 것이라는 회사의 판단 때문이었다. 이교수의 아이디어는 외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제품으로 현실화됐다. 중국계 미국인인 헨리 유엔이 리모콘으로 숫자만 누르면 간편하게 예약녹화 되는 'VCR 플러스'방식을 개발해서 인기를 모은 것이다(유엔의 개발 성공사례는 63쪽 상자기사 참조). 일본의 히타치사는 음성인식 예약녹화 방식을 개발해 상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에선 이처럼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왜 상품화되지 못할까. 전문가들은 기업가 정신의 부재를 그 원인으로 꼽는다. 외국에서 성공한 상품을 안전하게 장사하는 데에만 익숙한 한국의 기업가들은 획기적인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이면우 교수는 이런 기업가 정신을 "안타를 칠 자신이 없다고 타석에 나서지 않으려는 프로야구 선수의 정신상태와 다를 바 없다"고 비유했다.

또다른 한국형 예약녹화 방식 개발중에 G-코드 도입은 "외화 낭비" 지적도


 'VCR 플러스' 방식은〈조선일보〉와〈동아일보〉가 5월부터 텔레비젼 프로그램 안내란에 고유번호(G-코드)를 게재하기 시작하면서 국내에도 도입됐다. 5월9일자《TV저널》은 한 주간 프로그램의 G-코드를 모두 실어 이 예약녹화 방식은 조만간 보편화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가전업체 가운데 금성사와 삼성전자는 녹화재생기와 리모콘에 장비를 설치하는 데 한대당 6달러 50센트의 사용료를 내는 조건으로 젬스타개발사와 기술도입계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착되는 장비가 60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로열티 비증은 10%를 넘는 셈이다. 두 회사는 이 방식을 채택한 녹화재생기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금성사는 벌써 시판에 들어갔다.


우리 손으로 개발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은 감수하더라도 과연 높은 로열티까지 주면서 이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된다. 더욱이 많은 가전업체가 현행 예약녹화 방식보다 편한 한국형 방식을 개발중이었다는 것은 가전업계에선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우전자 영상연구소의 朴東玩 선임연구원은 "구체적으로 공개할 순 없지만 회사마다 선진국의 여러 방식을 비교해 한국형 예약녹화 방식을 개발중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특허권 때문에 외국의 예약녹화방식을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모방할 수는 없다. 금성사의 한 관계자는 "순식간에 예약녹화되는 방식은 특허를 받은 'VCR 플러스'방식이 유일하다"며 독자적인 예약녹화 방식을 개발할 가능성에 회의를 표시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개발된 많은 기술이 특허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선진국의 기술을 모방해왔다는 점도 기억할 만하다. 국내 가전업체들이 선뜻 'VCR 플러스' 방식을 한국형 예약녹화 방식으로 결론짓지 못한 것은 우리가 처한 몇가지 현실 때문이었다. 우선은 선진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방송국 사정에 따라 예정된 프로그램이 자주 변경된다. 독일에서 보편화된‘비디오 프로그래밍 시스템(VPS)'은 시간이 바뀌어도 프로그램을 추적해서 녹화한다. 다른 한가지는 선진국에선 프로그램이 시간대별로 나눠진데 반해 국내에선 분대별로 나눠졌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두자리에서 여덟자리 숫자로 지정하게 된 고유번호의 자리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5월부터 일부 일간지에 게재되는 프로그램 고유번호는 일곱 자리와 여덟자리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미 보급된 7백만대의 재래식 녹화재생기를 갖고 있는 시청자들이 이 방식을 활용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G-코드를 도입한 언론사에선 새로운 리모콘을 구입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특수장비가 부착된 녹화재생기를 새로 사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서둘러 새 방식을 도입하기보다 우리에게 맞는 한국형 예약녹화방식을 개발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국내 기술로 제품화가 가능했고 외화낭비와 소비자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타석'에 나서기를 꺼리는 기업인들과 앞다퉈'타석'에 덤벼들려는 언론사 사이에서 업계의 기술개발 의욕이 꺾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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