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들의 마음을 잡아라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6.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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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참여 형사 모의재판 참관기/일반 시민 등 참가, 열띤 토론 거쳐 ‘평결’
 
“1초, 2초, 3초···30초, 이상으로 논고를 마치겠습니다.”
서울중앙지검 금태섭 검사가 30초를 세는 동안 재판정에는 침묵이 흘렀다. 금검사는 피해자가 30초 동안 목이 졸려 사망했다면서 배심원들이 그 시간을 실감나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 직접 숫자를 셌다. 금검사의 최후 논고 형식은 그야말로 한 편의 영화였다.

지난 4월12일, 서울중앙지법 466호 민사대법정에서는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법원행정처·대검찰청·대한변호사협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국민참여 형사모의재판’이 열렸다. 배심원제 도입을 앞두고 운영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 제도를 널리 홍보하고자 마련한 자리였다.

이날 참여한 배심원들은 크게 세 부류였다. 일정한 절차를 거쳐 뽑힌 서울중앙지방법원 관내 주민 아홉 명과 영화감독 임권택씨, 시인 김용택씨, 영화배우 장미희씨 등 명예 배심원으로 선정된 문화예술인 아홉 명 그리고 언론인 배심원 일곱 명이었다. 기자는 언론인 배심원으로서 모의재판에 참가했다.

 “배심원들은 법과 증거에 의해 진실한 평결을 내릴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라는 선서가 끝나니 갑자기 신분이 바뀐 듯한 느낌이 밀려왔다. 재판장인 김동오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재판 순서를 소개한 뒤 “배심원들은 선입견이나 편견을 버리고 법정에서 조사된 증거에 의해서만 판단해야 한다. 메모지를 사용할 수 있지만 재판이 끝나면 폐기해 달라. 동료 배심원과도 의논할 수 없다”라며 유념해야 할 사항을 전달했다. 배심원들 앞에는 검찰 공소장, 재판장이 배심원들이 판단을 하기에 앞서 준수해야 할 내용을 적은 A4 용지 두 장짜리 문서와 함께 메모지 네 장과필기도구가 놓여 있었다.

재판은 검사가 공소장을 낭독하면서부터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검사와 변호인은 과거 같으면 재판장을 의식하며 공방을 벌였을 터이지만, 이날 재판에서는 시종일관 배심원들을 바라보면서 분위기를 유리하게 조성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금검사는 “피고인은 술에 취한 남편이 다리를 차 넘어뜨리고 목을 조르자 그동안 쌓인 감정이 폭발하여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피해자를 밀어 소파에 넘어뜨린 후 보자기로 목을 엑스자 모양으로 감아 질식시켜 살해했다”라며 ‘살인’이라고 주장했다.

금검사는 ‘현명하신 배심원 여러분’이라고 부르며 “보자기로 목을 감았다. 사고였다면 인공호흡을 하거나 구급차를 불렀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피고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증거를 통해 판단해 달라. 생명은 지구보다도 소중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엄마가 (119가 아닌)112에 신고하라고 했다”는 아들의 진술, “눈, 입안의 모세혈관이 터져 피가 나왔다. 15초에서 30초 정도 목이 졸릴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의 진술을 주요한 과학적 근거로 내세운 금검사는 “배심원 여러분, 이 대목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며 배심원들의 마음을 잡으려고 애썼다.

아내의 남편 살해, ‘폭력치사’로 판정

반면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덕수 소속 진선미 변호사는 피고인이 14년 전 결혼한 남편으로부터 폭력에 시달려 왔으며 사건 당일에도 술에 취한 남편이 폭행을 계속하자 죽을 수도 있겠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정당하게 방어한 것이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피해자가 알코올 중독자여서 보통 사람에 비해 간이 두 배 가까이 팽창한 지방간 증세를 보였던 것도 사망 원인과 중요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진변호사는 때로는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때로는 영상 자료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검사의 주장에 맞섰다. 진변호사는 “엄마가 아빠를 죽이고 싶다고 말한 적은 없다”는 아들의 진술과 “남편의 힘을 빼려고 보자기로 목을 눌렀을 뿐 엑스자로 조인 적은 없다”는 피고인의 법정 증언을 강조했다. 진변호사는 사건 당일 피고인이 남편으로부터 구타당해 몸 곳곳에 피가 맺혀 있는 부위를 찍은 사진을 배심원들에게 보여주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재판은 4시30분이 되어서야 끝났다. 재판을 보면서 누가 배심원이 되는가도 중요하지만 배심원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검사나 변호인의 능력 또한 재판에 있어서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판 과정을 꼼꼼히 지켜본 배심원들은 이후 각 그룹별로 회의실로 이동해 평결에 들어갔다. 외부인 출입이 차단된 회의실에는 부검의가 낸 부검 소견서, 현장 검증 사진, 피해자의 병원 치료 확인서 따위 배심원들이 평결하는 데 도움이 될 ‘물증 파일’이 있었다. 활발한 토론이 1시간 이상 이어졌다.

언론인 배심원들은 ‘살인’은 배제하자는 데 쉽게 합의했다. 보자기를 이용하는 등 치밀한 각본이 없는 데다가 ‘죽일 생각이었다’는 고의성을 입증할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언론인 배심원 대부분은 ‘폭행치사’에 방점을 찍었다.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는 배심원도 있었다.

그러나 ‘매맞는 아내 증후군’을 변호인측에서 구체적으로 입증하지 못했고 정당방위로 보기에는 ‘위급성’ 정도가 약하다는 논리에 밀리면서 결국 만장일치로 ‘폭행치사’로 유죄를 인정하되 평소 남편으로부터 폭력을 당해온 점을 고려해 집행유예 판결을 내리자고 평결했다. 일반인 배심원들은 5 대 4, 문화예술인 배심원들은 7 대 2로 폭행치사로 평결했다. 재판부는 징역 2년 실형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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