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상상력 실험하는 ‘나노봇’
  •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06.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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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식의 시사과학]

 
지난 3월22일 일본 도쿄 대학에서 분자기계 두 개를 결합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분자기계는 나노미터 세계에서 존재한다. 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로서 사람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에 해당하는 길이이다.

 지난 10여 년간 나노 기술자들은 2.5나노미터 크기의 엘리베이터 등 나노기계를 만들었지만 모두 실험용에 불과했다. 그러나 도쿄 대학은 다음 단계로 여러 개의 분자기계를 결합해 더 큰 기계를 만들 계획임을 밝혀 이른바 나노봇(nanobot) 개발의 대장정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나노봇의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미국의 에릭 드렉슬러에 따르면 이 로봇은 사람 몸속에 들어가 잠수함처럼 혈류를 헤엄치고 다니면서 바이러스를 박멸하거나, 자동차 정비공처럼 손상된 세포를 수리한다. 드렉슬러의 아이디어는 한때 농담으로 받아들여졌으나 나노의학의 선구자인 로버트 프리타스에 의해 구체화 됐다.

그는 인간 적혈구 세포의 기능을 가진 나노봇의 개발을 제안했다. 호흡세포(respirocyte)라 명명된 이 로봇을 몸에 주입하면 단거리 경주 선수가 15분 동안 단 한 번도 숨을 쉬지 않고 역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리타스는 병원균과의 싸움에서 백혈구 세포보다 성능이 뛰어난 대식세포 로봇(robotic macrophage), 사람 세포에서 노폐물을 청소하는 로봇 등을 설계했다. 이와 같이 나노봇이 치료할 수 없는 질환이 거의 없어 보인다. 어쩌면 인간의 굴레인 노화와 사멸까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자기 증식 나노봇’이 지구 종말 몰고 온다?

한편 나노봇의 자기 복제 기능을 두고 열띤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다. 드렉슬러가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분자기계가 실현될 것이라고 전망했기 때문이다. 이 나노봇은 생물체의 세포처럼 자기 증식이 가능하므로 얼마 뒤에 두 번째 나노봇을 얻게 되고, 조금 지나서는 네 개, 여덟 개 등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힘으로 통제 불가능한 재앙이 발생하지 말란 법이 없다. 인체 안에서 활동하는 나노봇이 돌연변이를 일으켜 암세포를 죽이지 않고 제멋대로 증식한다면 생명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유독 쓰레기를 제거하기 위해 뿌려놓은 나노봇이 자기 복제를 멈추지 않으면 지구는 로봇 떼로 뒤덮일 게 아닌가.

드렉슬러는 자기 증식 나노봇이 지구 전체를 뒤덮게 되는 상태를 잿빛 덩어리(grey goo)라고 명명했다. 이른바 그레이 구 상태가 되면 인류는 최후의 날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빗대어 프리타스는 나노봇 재앙 시나리오를 몇 가지 제시했다. 가령 나노봇이 물 속에 녹아 있는 탄소를 몽땅 집어삼키는 그레이 플랑크톤(grey plankton), 나노봇이 먼지와 햇빛 속의 원소를 흡수해 에너지로 사용하는 그레이 더스트(grey dust) 같은 시나리오들은 상상력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드렉슬러의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나노봇이 특정 임무를 마치거나 소정의 활동 시간이 지난 뒤에, 자기 증식이 정지되거나 스스로 자살하게 만드는 소프트웨어를 장착하면 그레이 구의 재앙은 모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은 자기 복제 나노봇은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공상이라고 비웃는다. 특히 리처드 스몰리(1943~2005)는 드렉슬러의 자기 증식 로봇은 과학과 환상의 세계에 양다리를 걸친 허무맹랑한 농담이라고 일소에 붙였다. 스몰리는 1996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나노 기술 이론가이다.

2002년 마이클 크라이튼이 드렉슬러의 아이디어를 액면 그대로 수용한 소설 <먹이>를 발표해 그레이 구 시나리오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고조되었다.
나는 어느 편인가 하면, 스몰리보다 드렉슬러를 지지하고 싶다. 인간의 꿈과 상상력이 실현되는 것처럼 신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과학문화연구소장, 국가과학기술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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