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생활도 연구"軍事 두뇌 집단 살아남기 안감힘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3.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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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랜드 연구소, 국방비 감소로 일거리 격감 보건 . 교육 등 민강 정책 개발에 눈 돌려

전통적으로 국방부의 기밀 과제만을 연구해온 미국의 대표적인 두뇌집단 랜드 연구소(RAND Corp.)가 최근 본업과 거리가 먼 조사를 실시해 구설수에 올랐다. 이번 조사는 캘리포니아주 샌타 모니카 고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하여 학생들이 손쉽게 콘돔을 구하는 것이 그들의 성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랜드 연구소 하면 곧'국방 기밀 과제 연수고'라고 인식해온 일반 시민은 이 연구소가 난데없이 고등학생의 성생활에 대해 조사한다는 것에 어리둥절해했다. 특히 학생들이 받은 설문지에는 성에 관한 노골적인 질문도 포함돼 있어 큰 논란을 일으켰다. 한 소아과 의사는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랜드 연구소 사람들이 어떻게 고등학생을 상대로 이토록 음탕한 내용을 조사할 수 있느냐"라며 항의했다. 파문이 커지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컬럼니스트 앨 마티네즈는 논평의 통해"랜드 연구소가 내놓은 것에 무엇이든 흥미를 느낀다면 당신이 이미 랜드 도착증 환자"라고 신랄히 꼬집었다.

 45년 전통의 랜드 연구소가 고등학생의 성생활에 관해 조사해달라는 용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데는 속사정이 있다. 수십년동안 단골 고객이던 국방부의 예산이 줄어들면서 랜드 연구소의 수입도 격감해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랜드 연구소의 수입은 약 1억달러. 이 가운데 정부(주로 국방부)가 발주한 연구 용역비가 7천7백만달러였고 나머지는 기업체와 사설 재단 출연금 및 민간부문의 수입 비율이 8대 2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랜드 연구소는 98년까지 국방 부문과 민간 부문의 정책 용역수입 비율을 5대 5로 조정할 계획이라고 해 관심을 끈다. 국방예산이 줄면 그만큼 연구용역비도 줄어들 것이 뻔해, 랜드 연구소는 자구책으로 민간정책 연구를 대폭 활성화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해마다 의회로부터 국방 예산을 삭감하라는 압력이 커질 것이 분명한 이상 랜드 연구소도 그에 맞게 변신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지나 91년 미국내 정책 연구소의 실태를 분석한《정책의 중개상들(The Idea Brokers)》을 쓴 제임스 스미스씨는"랜드 연구소의 변화는 오늘날 국방관련 정책 연구소가 직면한 가장 고통스러우면서도 지적인 변화이다"라고 말했다.

45년간 국방 . 안보 용역 도맡아
 국방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이 랜드연구소뿐만은 아니다. 브루킹스 연구소나 헤리티지 재단도 랜드 연구소 못지 않게 국방문제를 깊이 있게 연구한다. 그러나 랜드 연구소의 강점은 48년 설립 당시부터 국방부의 암묵적인 지원 아래 국방과 안보 관련 연구용역을 도맡아 왔다는 점이다. 89년에만 랜드 연구소는 공군 정책과제로 2천2백50만달러, 국가안보 연구과제로 2천8백20만달러, 육군 연구과제로 2천1백만달러 등 모두 7천1백70만달어어치의 용역을 따냈다. 그러나 이른바'탈냉전 원년'인 90년을 고비로 랜드 연구소에 대한 국방부의 연구 용역도 점차 줄어들어 랜드 연구소는 수십년 동안 국방 연구 부문에서 얻은 경험을 민간 부문에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연구 과제 중에는 클린턴 행정부의 동성연애자에 대한 정책, 병력 감축이 사회에 미치는 파장 등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오랫동안 국방 정책 연구에만 종사해온 전문가들이 교육 정책 연구에 투입되고 있다. 이들은 얼마 전까지도'핵전쟁 때 미 공군에 대한 소련의 잠정 목표물'등과 같은 거창한 과제에 매달렸던 연구원들이다.

 해당 분야에 별로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엉뚱한 연구 과제를 맡기다 보니 자연 부작용도 따른다. 1년전 랜드 연구소는 국방 전문가 6명에게 교육 부문 과제를 맡겼다. 책임자 마이클 리치씨는"경험 부족도 문제지만 우선 연구원들이 민간 교육의 복잡성에 현기증을 느끼더라"고 말했다. 결국 이들은 중도에 연구를 포기한 채 본업인 국방연구 부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비록 어려움이 따르긴 해도 랜드 연구소는 민간정책 부문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지난 89년 은퇴할 때까지 17년 동안 랜드 연구소 소장을 지낸 도널드 라이스씨는"랜드 연구소 하면 늘상 국방 관련 용역을 맡는 곳으로만 인식하다 보니 민간정책 연구분야의 강점을 과소평가하기 쉽다"라고 말했다. 그는 랜드 연구소의 연수입의 30%(3천만달러)가 민간 부문에서 나온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액수는 경쟁 관계에 있는 브루킹스 연구소나 미국 기업 연구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선 뒤 랜드 연구소가 특히 집념을 보이는 연구 분야는 보건과 교육 부문이다. 제임스 톰스 소장은"1년 전만해도 볼품없던 민간 보문 계획의 전망이 밝다"며 조심스레 낙관론을 폈다. 한 예로 랜드연구소는 앞으로 5년간 미국의 학교제도를 연구해달라는 1천만달러짜리 연구 용역을 인디애나폴리스 소재 릴리 재단으로부터 받았다. 랜드 연구소는 이처럼 민간 부문을 강화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면서 그동안 소홀히 해온 홍보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해마다 연구서 2백50개 이상 쏟아내
 랜드 연구소는 연구 과제가 대부분 국가기밀이어서 최근까지만 해도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왔다.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연구소 간부들이 기업체나 사설 재단을 찾아 홍보에 열을 올린다. 보고서 제목도 예전처럼 무거운 분위기를 벗고 친근감 있는 것을 고른다. 최근 군기지의 환경 문제를 다룬 보고서의 제목을'초록의 두 얼굴'로 붙인 것이 한 예이다.

 두뇌 집단의 대명사로 불려온 랜드 연구소가 탄생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지난 45년 더글러스 항공사 소속 연구원이던 아서 레이먼드와 프랭크 콜봄은 B29 폭격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연구에 몰두했다. 이들은 B29 폭격기의 중량을 줄여 고도와 속도를 높임으로써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곧 헨리 아놀드 공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공군 수뇌부의 관심을 끌었다. 콜봄은 아놀드 총장에게 공군 발전을 위해 전문적인 민간 연구기관을 만들 필요성이 있다고 설득했다. 아놀드 총장은 샌타 모니카에 있는 더글러스 항공사 공장을 방문하는 자리에서 선뜻 1천만달러짜리 연구 과제를 콜봄 팀에게 맡겼다.

 이 팀은 47년 연구원 수가 1백50명으로 늘어난 큰 조직으로 발전했다. 48년 공군과 포드 재단의 축복 속에'프로젝트 랜드'팀은 더글러스 항공사에서 분리되어 비영리 두뇌 집단인 랜드 연구소로 정식 출범했다. 연구소 이름인'RAND'는'연구와 개발'이란 뜻의 영어'research and development'의 두문자를 딴 합성어이다.

 캘리포니아주 샌타 모니카에 본부를 둔 랜드 연구소는 △행동과학 △경제와 통계 △기계공학과 응용과학 △정보과학 △정치학 △시스템 과학 등 6개 연구실을 운영한다. 그밖에 노년문제 . 보건문제 . 취업교육 . 인구정책 . 마약정책 등을 전담하는 소규모 연구소를 12개 가지고 있다. 매년 랜드 연구소가 쏟아내는 각종 보고서와 정책 연구서는 2백50개가 넘는다.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맞아 랜드 연구소에 부는 변화의 바람을 자연스러운 것이다. 오랫동안 국방 관련 연구에만 종사해온 연구원들이 변화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는냐하는 것이 앞으로 과제다. 스티븐 드레즈너 부회장이"과거에 랜드 연구소는 국익을 보호한다는 자부심 속에서 일했다. 앞으로는 삶의 질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연구 과제를 전환하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다. 그러나 예전만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랜드 연구소가 맞은 변화를 가장 정확하게 설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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