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쓴 비운의 황태자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3.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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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병철 회장 장남 맹희씨,"선친 명품주의 잇겠다"

삼성그룹의 창업자 고 李孟熙씨(62)가 펴낸 책 두권이 화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삼성그룹의 대권을 물려받지 못하고 70년대 중반부터 겉돌던'비운의 황태자'는 왜 하필 지금 묻어둔 이야기를 들춰내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가.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지난 6월9일 삼성그룹은 계열사 정리 방안을 발표했다. 이 조처는 이맹희씨가 일가에 대한 재산상속의 성격도 띠고 있었다. 이전의 계열사 분리작업을 통해 창업주의 2세들에 대한 재산 분할을 대부분 마무리한 일가에 대한 분배만 숙제로 남겨두고 있었다.

 시기가 미묘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씨측도 인정한다. 그는 다만"더 나이가 들어 희미해지기 전에 기억을 남겨놓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책을 내면서 자기 동생이 대권을 장악한 삼성그룹의 반응도 약간은 고려했던 것 같다. 우선 출판사를 선정하면서 신중을 기한 점이 그 증거이다. 삼성그룹에 껄끄러운 책이 출판됐을 때 해당 출판사의 책을'싹쓸이'했던 전례를 감안해'강골'출판사를 선택한 것이다. 두 권의 책이 출판됐다는 소식이 알려진 지난 6월28일 이맹희씨는 신라호텔 숙소에서 오랫동안 가족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술 잘먹는 양녕대군'악성 소문 해명
 이씨는 그동안 자신에게 들씌워졌던 불명예와 오해가 무척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이씨의한 측근은"이회장께선 명예을 회복하고 싶어하시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지난 20여년 동안 외유와 운둔생활을 해온 그에게 따라붙은 대표적 악성 소문은'술 잘먹는 양녕대군'이라는 것이었다. 이씨는 회상록 앞쪽에서 자신은 청주가 든 우동 국물만 먹어도 취기가 오르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자신의 수난이 일반에 알려진 것처럼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명은 주로 책 끄트머리에 실려있다. 이씨는 자기가 부친과 결정적으로 사이가 멀어지게 된 것은 동생의'모반 사건'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사카린 원료 밀수사건(한비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는 등 온갖 뒤치다꺼리를 한 이창희씨가 70년에 아버지의 비리를 사직당국에 고발하는 탄원서를 냈는데, 이병철 당시 삼성그룹 회장은 이 모반에 자기장남이 관련돼 있다고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이맹희씨의 회고 가운데 흥미로운 부분은 부자 간에 틈이 생기기 시작한 계기가 된 66년 7월의 사카린 밀수사건. 이씨의 또 다른 측근은"이후락씨를 빼면 이 사건의 진실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었고, 이후락씨가 진실을 밝힐 것 같지도 않아 이 사실을 공개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병철 전 회장이 86년에 출판한《호암자전》에'몇몇 정치인의 의도적인 작해공작'으로만 묘사된 이사건에 대해 이맹희씨는 밀수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기계설비를 수입하면서 받은 리베이트를 국내에 들여오기 위해 밀수를 했으며, 당시 박정희 정권도 이를 묵인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정치 문제로 비화하게 된 것은 리베이트를 집권공화당에게 정치자금으로 제공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당시 정치자금 배분 과정에서 소외받고 박대통령으로부터도 멀어졌던 공화당 실력자 김아무개가 배후에 있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명예 회복을 바라는 이씨는 복귀는 꿈꾸고 있다. 그러나 삼성그룹과 관련된 회사로의 복귀는 아니다. 그는 마지막 정열을 불태울 연구소와 회사를 차렸다. 분을 삭이기 위해 오랫동안 몰두해온 분재를 상업화하기 위해 제일식물연구소를 차렸다. 회사는 제일비료라는 유기질 비료 전문 업체이다. 이 회사는 선산이 있는 경북 의령에 공장을 짓고 있다. 그는 각종 폐기물과 동물성 단백질로 죽은 농토를 살릴 유기질 비료를 만드는 데 집착해왔다. 아버지의'명품주의'를 물려받았다고 자부하는 대목이다. 그는"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 자꾸만 애정으로 바뀌어간다"고 한다.
金芳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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