巨山이 넘어야 할 대미외교 산맥
  • 문정우 기자 (mjw21@sisapress.com)
  • 승인 1993.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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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방한 때도 내용보다 모양새 신경…일관성 유지.정보 다각화 숙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1박2일 간의 한국 방문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갔다. 클린턴은 방한 기간에 국회에서 연설도 하고 김영삼 대통령과 조깅도 함께 하면서 양국 간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번 회담에서는 여태까지의 한.미 정상회담보다 절차가 많이 간소화되긴 했으나 내용보다 모양새를 더 중시하는 관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조깅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방영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사전에 양국 의전 담당자가 왈가왈부할 때부터 그런 조짐을 보였다.

 물론 이번 회담 하나만 놓고 보면서 김영삼 정부의 대미 외교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성급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차제에 그동안 정통성이 결여된 역대 정권이 일그러뜨려 놓은 대미 관계를 어떻게 바로 펼 것인지 김영삼 정부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김영삼 정부의 대미 관례 일 처리가 매끄럽지 못한 것 같다는 지적은 진작부터 나왔다. 특히 김대통령이 미.북한 협상과 관련해 지난 6월25일 영국 BBC방송과 회견하면서 “미국은 북한에 대해 어떠한 추가적인 양보를 해서도 안된다”고 불만을 터뜨린 것으로 보도돼 대미 외교 채널에 이상이 있지 않는가 하는 우려는 더욱 증폭됐다.

이례적인 대미 불만 발언
 게다가 한승주 외무부장관은 BBC 보도 이틀 위인 6월27일 미국이 북한과의 회담에서 한국을 소외시키지 않았다고 밝혀 정부 부처 간에도 손발이 맞지 않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정부는 “BBC 기사는 기자가 김대통령의 말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해 의미를 왜곡했다”고 해명했으나 미진한 구석을 남겼던 것이 사실이다. BBC의 보도는 김대통령의 말을 액면 그대로 전달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김대통령의 본심에 접근한 것으로 짐작된다.

 김대통령의 BBC 발언은 대미 관계에 있어서 김영삼 정부의 의지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의 결정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터뜨린 일은 거의 없었다. 지난 54년 7월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일 회담 재개 요구를 매몰차게 뿌리친 일은 있었다. 당시 화가 난 아이젠하워는 회담장을 박차고 나갔고 이대통령도 “이런 고얀 일이 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뒤로 미국의 비위를 정면으로 거스른 대통령은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 말기에 인권 문제와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카터 대통령과 매우 불편한 관계였으나 공식석상에서 미국을 비난하는 것은 삼갔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외교사적으로 일대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문민 정부의 대통령으로서 자신감을 갖고 미국을 대하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김대통령은 미.북한 회담에 대한 판단을 안기부 정보보고에 의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시사저널》 7월15일자 참조). 결국 의지는 문민적이지만 판단을 과거 정부와 마찬가지로 정보기관의 첩보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물론 정보기관의 보고를 판단의 근거로 삼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김영삼 정부의 처지가 모든 판단을 전적으로 안기부의 정보보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정부의 한 고위 관료는 “김영삼 대통령은 아마도 대통령이 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안기부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깨달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외교 업무를 맡고 있는 외무부나 통일원도 나름대로 정보수집 작업을 하고는 있으나 안기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업무 수행 능력이 떨어진다. 미국의 경우 국무부 산하의 정보기관은 전문 분야에서만큼은 CIA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정보수집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전문가의 식견으로 걸러내기 때문에 정보의 질 또한 우수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 안기부의 정보수집 능력이 절대적으로 뛰어난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서방의 한 외교관은 “미국 CIA의 정보 수집 능력이 A급이라면 한국 안기부의 해외 정보 수집 능력은 점수를 잘 줘봐야 C급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혹평한다. 안기부 관계자들도 “해외 정보 수집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영어에 정통하고 뛰어난 판단력을 갖춰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왜 고달픈 안기부 생활을 하겠느냐”라고 말하고 있는 형편이다.

 안기부가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상태에서 부처 간에 손발이 맞아 돌아갈 리가 없다. 미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한국 외교는 네마리 말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라고 비꼰다. 그는 클린턴이나 김대통령이 모두 비슷한 처지에 있기 때문에 한.미 관계가 더욱 삐걱거린다는 얘기도 했다. “클린턴도 민주당 정권의 12년 공백을 메우지 못해 공화당 사람을 그대로 쓰고 있고, 김대통령도 민주계 인사만으로 일을 하려다 보니 극심한 인물난을 겪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물론 부처 간에 소리가 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과거 정권 때보다 행정이 투명해져 언론에 손쉽게 포착되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 고위 외교관 출신 인사는 “김영삼 정부는 외교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당장 해야 할 일과 시간을 두고 개선할 문제를 나눠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는 안기부나 외교 관련 부처의 업무 수행 능력을 높이는 것과 같이 시간이 걸리는 문제말고도 당장 뜯어고쳐야 할 관행이 많다고 말한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정상회담이 있을 때마다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 대통령을 우정으로 대해 주었다는 사실을 부각하기 위해 지나치게 정력을 낭비해왔다. 이번에 굳이 두 대통령의 조깅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하겠다고 고집을 피운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정상회담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모양새가 아니다.

발상 못지않게 실천서도 ‘문민화’ 중요
 양국 정상회담이 끝나면 공식 합의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성숙한 동반자’라는 말이다. 자꾸만 쓰다 보니까 이제는 으레 들어가야 하는 말처럼 돼버렸다. 다른 나라의 외교문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말이라고 한다. 한.미 관계가 아직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북한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북한은 이번 미국과의 협상 합의문에 ‘대등하고 공정한 관계로’라는 말을 넣자고 고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양국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북한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지 않은 것도 문제이다. 김대통령이 BBC와 회견한 다음 미국의 언론들은 “한국은 북한을 거칠게 다루지 말라고 주문하면서, 정작 미국이 그렇게 하면 항의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이미 오래 전에 7.7 선언에서 ‘북한이 고립되지 않도록 우방이 도와줘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도 정작 행동은 그와 반대로 해온 경우가 많았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같은 민족이면서 동시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북한에 대해 이중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해왔으나 그로 인해 알게 모르게 손해를 많이 봐온 것이 사실이다. 북한에 대한 입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미국에 어떠한 요구도 당당하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문민적 시각으로 검토할 시점이 됐다.

 미국과 북한이 무역대표부를 두거나 국교를 수립하는 것이 정말 그렇게 펄쩍 뛰며 말려야 되는 일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필요하다면 미국과 북한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발벗고 나설 수도 있을 것이다. 외교 전문가 중에는 “우리나라는 이미 중국이나 러시아와 국교를 수립한 마당에 북한이 미국과 수교해선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김영삼 정부는 문민 정부로서 자긍심을 갖고 국익을 대변할 수 있으려면 발상과 실천이 모두 철저히 문민적이어야 할 것이다.
文正宇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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