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과 ‘딴 살림’ 안차린다더니…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3.07.2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양보’에 의구심…대북 강경 선회, ‘합의서 정국’ 원점으로



 남북관계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회복은커녕 점점 대립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취임 당시만 해도 민족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전향적 대북정책을 시사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핵무기를 가진 상대와는 악수할 수 없다”며 북한을 보는 시각을 ‘전쟁준비를 위해 지연전술을 쓰는 집단’ 정도로 뒤바꾸었다. 주요 부서 책임자들도 입만 열면 대북 강경론을 펴고 있다.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기는 북한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김대통령에게 상당히 호의를 보이는 듯하더니 요즘은 김대통령을 ‘한 입 가지고 두 말을 하며 표리부동하게 처신하는 정치 간상배’라고 비난하고 있다. 불과 1년전 합의서 이행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의 들뜬 분위기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수십년간 남북관계를 짓눌러온 찬 공기가 휴전선을 가르고 있다.

 남북한은 90년 9월 첫번째 고위급회담을 시작한 이래 2년여 동안 여덟 번의 총리회담, 1백여회의 대표 접촉 및 분과위 회의를 통해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이라는 뜻깊은 성과물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합의서 정국은 실천 단계로 접어들기 직전에서 핵 문제를 둘러싼 국제적 긴장 관계를 이기지 못한 채 파산하고 말았다.

 92년 10월 한.미 양국이 연례안보협의회에서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를 예고하자 북한은 92년 11월로 예정된 4개 공동위 가동을 거부했고 이에 따라 92년 12월로 예정되었던 9차 고위급회담도 무산됐다. 국제원자력기구가 93년 2월25일 특별사찰 수용을 촉구하는 ‘결의안 2636호’를 채택한 데 대해 3월12일 북한이 핵금조약 탈퇴라는 극약처방으로 맞대응하면서 한반도 정세는 급속히 위기 상황으로 치달았다. 북한의 핵 문제가 ‘국제적 공조’의 대상이 되면서 남북관계는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7월7일 닷새 동안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열린 한국학 국제학술대회에서 林東源 민족통일협의회 의장(전 통일원 차관)은 <남북 대화;문제와 전망>이라는 논문에서 남북관계가 경색된 배경을 이렇게 진단했다. “90년대 들어 남북대화가 가능했던 것은 동북아 냉전구조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남북한 모두가 대화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지금 남북대화가 막힌 것은 냉전구조의 해체가 미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남북관계 진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북한의 핵개발 의혹과 △북한과 미국 사이의 적대관계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남북한 사이의 불신과 대립이 여전하다는 점을 꼽았다.

김대통령 “더이상 양보 없어야”
 임의장이 제시한 거시적 분석틀에 따르면 남북한과 미국 3자 관계에 굳게 걸려 있는 핵 문제라는 빗장이 남북관계 경색의 주된 원인인 셈이다. 최근 남북한이 ‘특사 교환’과 ‘고위급회담 실무접촉’을 놓고 공방을 벌인 것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양측은 2차례의 서신과 11차례의 전화통지문 등을 교환하며 대화의 의제와 형식을 놓고 줄다리기를 벌였지만 끝내 이견을 좁히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남북회담 사무국의 한 실무자는 “북한은 남한에 새 정부가 등장하면 통상 1년 정도 탐색기간을 갖는다. 특사교환 제안은 한국 정부를 시험해보는 한편 남북대화를 북.미 회담에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수 의견이긴 하지만 색다른 해석도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정부 고위 당국자는 “북한은 북.미 회담을 앞두고 남측에 대해 남미식 사찰방안을 제시하고 이를 대미협상에 활용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그 배경이야 어찌되었건 정부 당국은 특사 교환 문제에서 ‘핵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남북관계의 실질적 진전은 없다’는 원칙을 엄격히 견지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것 같다. 게다가 김대통령은 뉴욕회담 직후 “더이상의 양보는 없어야 한다”며 내친 김에 미국에 대해서까지 근엄한 훈계를 하고 나섰다. 김대통령은 7월1일 <뉴욕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내년 초까지 북한은 수개의 핵폭탄을 생산하는 데 충분한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시간이 많지 않다”며 북.미 회담이 장기화하는 것에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한승주 외무부장관도 “1~2개월 안에 북한이 사찰을 받지 않을 경우 유엔의 제재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과시하고 있는 강경한 태도의 이면에는 핵 문제를 둘러싼 미.북한 관계에서의 무력감이 짙게 깔려 있다.

 한국 정부는 미.북한 회담을 3단논법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즉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원한다→미국은 남북관계 개선을 미.북한 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삼는다→따라서 북한은 남북회담의 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한승주 외무부장관은 6월30일 관훈토론회에서 “북한이 미국과 관계개선을 원한다면 결국 남북회담의 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라고 자신했다.

 이처럼 ‘남북관계가 개선되기 전에는 결코 북한과 딴살림을 차리지 않겠다’라는 미국측의 약속이야말로 한국 정부에게는 생명의 동아줄과도 같은 것이다. 말일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한국은 남북관계에서 사실상 주도권을 잃게 된다.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이 미국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북한은 한국의 이같은 난처한 입장을 ‘외세의존적 태도’라며 마음놓고 공격해 왔다. 북한으로서는 미국과의 대화만 잘 풀린다면 남측 당국자를 더 이상 만날 이유가 없다.

 그런데 한국 정부를 불안하게 하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자꾸만 들려온다. 이는 《시사저널》의 취재로 밝혀진 다음의 사실들에서 드러난다. 서울에 주재하는 한 서방 외교관은 “뉴욕회담에서 미국은 실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약속을 북한에 해주었다. 거기에는 무역대표부 개설도 포함된다”라고 말했다.(《시사저널》제193호 참조). 또 다른 소식통은 ”북한은 미국이 경수형원자로 기술을 제공할 경우 재처리시설을 폐기하겠다는 제안을 비공식적으로 했다“고 말했다(《시사저널》제194호 참조). 그 뿐이 아니다. 북한은 뉴욕 회담에서 미국측에 대해 ‘국제원자력기구가 참여하는 남북상호사찰’이라는 새로운 사찰 방안을 제의한 것으로 알려졌다(《시사저널》제194호 참조). 브라질.아르헨티나 사이에 실시되고 있는 이 ‘남미식 사찰방안’ 제안이 뒤늦게 전해지면서 청와대를 비롯한 관련 부처에는 대책 마련을 위해 비상이 걸렸다. 이 모든 것들이 한국 정부에 공식 전달되지 않았거나 사후에 전해진 사항들이다.

 한국 정부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주로 안기부를 통해 전달되는 그런 분위기는 김대통령을 점차 강경파로 바꾸어가고 있다. 김대통령은 6월17일 녹화되어 6월25일 일부 방영된 영국 BBC방송과의 회견에서 미.북한 회담 결과에 불만을 터뜨렸다. 이경재 청와대 대변인은 이 내용이 ‘대통령의 본심’이라고 친절한 해설까지 곁들였다. 한국 정부가 뉴욕회담의 결과를 놓고 미국측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대국 강경 발언을 되풀이하는 이유도 미국이 북한과의 직거래를 틀 경우 한국만 외톨이가 되고 말 것이라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같은 상황을 두고 <뉴욕 타임스>는 ”북한이 핵금조약을 탈퇴할 때만 해도 한국 정부는 조용한 설득을, 미국은 강경대응을 주장했다. 석달이 지난 지금 양측 입장은 반대가 됐다“고 보도했다.

미국.북한 직거래 트면 한국만 ‘외톨이’
 남북관계 경색의 책임이 어느 쪽에 있건 남북관계가 핵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은 분명하다. 정부 내에서도 강.온을 불문하고 어떤 이는 단호한 의지로, 어떤 이는 체념한 상태로 이같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북한 핵 문제에 대한 국제적 공조체제에 동참하면서 민족 내부문제를 함께 껴안는다는,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무진 애쓰고 있다. 그러나 김대통령 스스로 인정했듯 그 원칙을 준수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북한의 대미전략은 대체로 성공을 거두고 있고, 그럴수록 정부가 애지중지하는 그 원칙에 대한 의구심도 점차 높아지는 것 같다. 최근 핵 문제를 놓고 정부 각 부처 간에 이견이 심하다는 보도도 있지만, 그 역시 서로 다른 원칙의 대립이라기보다는 북한과 미국의 의중을 어떻게 파악하느냐를 놓고 벌이는 무기력한 논쟁의 산물일 뿐이다.

 미국과 북한은 7월14일 제네바에서 시작되는 제2라운드 미.북한 회담을 앞두고 있다. 1라운드 회담의 주제가 북한의 핵금조약 복귀였다면 이번 회담의 초점은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이 이루어지느냐에 있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가 미국 스파이 위성이 찍어 온 사진을 근거로 사찰을 요구하는 것은 ‘불공정’하기 때문에 사찰은 받을 수 없고 정치협상이나 하자며 딴청을 피우고 있다. 미국은 “노상 회의만 하고 있지는 않겠다”며 엄포를 놓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한국은 아무런 영향력도 없이 누가 먼저 양보를 할 것인지를 지켜보는 데 만족해야 할 것 같다. 통일원의 한 실무자의 말처럼 정부의 대북정책 엘리트들은 지금 ‘우울한 여가’를 보내고 있다.
韓宗鎬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