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터널 벗어나는 길
  • 박권상 (편집 고문) ()
  • 승인 1993.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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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와 이념이 다르고 이해가 첨예하게 맞선 마당에 통일부터 이루려는 생각은 긴장을 격화시킬 수 있다.”

나는 얼마 전 유럽 여행중 믿을 만한 소식통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우리는 역사의 선물로서 동독을 흡수하여 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두가지 어려움에 깜짝 놀랐다. 그 하나는 통일에 따르는 엄청난 경비이고, 다른 하나는 동독 사람도 같은 피를 나눈 독일 사람임에 틀림없는데 막상 통일을 하고 보니 전혀 이질적인 사람들이더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 아닌 헬무트 콜 총리가 비공식석상에서 탄식했다는 이야기다. 직접 듣지 않았으므로 정확한 내용이나 뉘앙스는 헤아릴 수 없다.

 독일의 통일은 공산주의 및 소련의 붕괴 과정에서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서독 사람들은 당연히 이 ’우연득지‘에 대해 두손을 들어 환호하고 역사의 쾌거로 받아들인 것이 사실이다. 우선 45년 간의 동서 냉전이 서방측의 승리로 끝났고, 그 과정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동독 정권이 손을 들어 서독에 흡수된 것이다.

 독일 통일의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유와 시장경제 체제가 동독 땅에 연장된 것이고 1천7백만 동쪽 사람들이 6천3백만 서독 사람들에 흡수된 것이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이루어낸 자유의 승리였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인류 역사의 발전이었던가.

독일 국민 96%, 통일후 현실에 불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4년이 흘렀다. 지금 통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겪는 경제 침체와 위기에 직면해 사회적인 갈등과 혼란에 빠졌다. 서독 사람에게 통일은 곧 창의력이 없고 빈곤에 시달리는 동독인 1천7백만명을 끌어들여 먹여 살려야 할 굴레를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덕택에 지난 40년간 유럽 경제의 모범생이자 선두주자로 유럽 경제 통합의 엔진 노릇을 했던 독일 경제가 삐걱거리기 시작하여 실업자가 3백만명 이상, 92년 성장률은 마이너스 3%라는 기록을 세웠다.

 독일이 휘청거리니 프랑스.영국 등 서유럽 경제가 흔들리고, 그 영향이 우리나라에는 수출 부진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작년만 해도 44만 명의 동유럽 피난민이 독일로 몰려들었고 금년에는 더욱 늘어나는 경향이다. 유고에서 전투가 멎고 동유럽의 경제 상태가 안정되지 않는 한 피난민의 물결은 앞으로도 막을 길이 없을 것이다.

 보기에 딱하고 민망할 따름이다. 독일 국영 ZDF 텔레비전이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 사람의 무려 96%가 현실에 불만을 느끼고 있다. 46%가 ‘큰 문제’라는 반응이고 38%가 ‘어려운 위기’라는 답변이고 12%가 ‘파국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4%만이 독일은 괜찮다고 했으니 비참할 정도의 비관론과 패배주의다.

 ‘터널의 끝에 빛이 안 보인다’는 것이 그들을 지배하는 현실 감각이다. 우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워싱턴 푸스트>는 ‘꿈을 잃고 악몽을 꾸고 있는 독일’이라고 보도하였다.

 통일 독일의 어려움이 그대로 우리 한반도에 적용될 것이라고 비관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우리 민족 통일을 부정하거나 포기해야 한다는 논리는 더더구나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통일 문제에 소중한 참고로 삼을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급작스러운 흡수 통일이 몰고올 엄청난 혼란과 파국을 사전에 제어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통일 ‘명분’보다 상호교류로 ‘현실’ 다져야
 그런 뜻에서 상당한 기간 상호 체제를 인정하는 우호적인 공존관계가 지속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그런 연후에 북한 체제가 좀더 문명화하고 북한의 경제가 좀더 활성화하고 사회가 좀더 자유화하여 남북 간에 서로 통하는 공통분모가 넓어질 때 연합이건 연방이건 좀더 친근한 관계로 옮겨갈 수 있다. 남과 북은 경제.사회 등 하부구조가 어느 정도 동질성을 회복하고 활발한 상호 교류와 합작으로 분단의 고통이 사실상 없어진 상태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민족 자결의 원칙에 따라 통일의 대업을 성취할 수 있다. 먼 훗날의 일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것은 우리의 통일 문제에 딱 들어맞는 잠언이다. ‘통일이야말로 모든 것에 우선하는 민족의 지상 과제’라는 소명의식은 대의명분상 나무랄 것이 없다. 그러나 명분과 현실의 깊은 골을 외면할 수 없다. 체제와 이념과 문호가 판이하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수십만명의 군대가 맞서 있는 마당에 ‘무조건 통일’을 성취하려는 생각은 더욱 더 긴장과 대립을 격화시킬 수밖에 없다.

 점진적으로 쉬운 것부터 풀어가야 한다. 제일 실속있는 것이 경제 합작이고, 북한도 이를 절실히 원하고 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렵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가. 만일 경제가 악화돼 더 궁핍해진다면 북한 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게 어디 무너지는 데서 그칠 것인가. 그것은 대폭발로 연결될 수 있다. 수십만명의 잘 훈련된 군대가 있는 북한이다. 그들이 어느날 갑자기 무너지고 폭발하는 일이 생긴다고 가정할 때, 그것이 우리한테 반드시 이로울 것인가도 신중히 저울질해야 한다. 책임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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