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습관 길러 아시아 안보 다진다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3.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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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이 끝난 뒤로도 아시아의 안보 상황은 여전히 불안하다. 북한의 핵 개발 의도, 인도와 파키스탄의 군사적 긴장 관계, 남지나해상에 있는 스프래틀리 군도와 파라셀 군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중국과 베트남의 갈등, 북방 4개 도서 반환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마찰 등 아시아 곳곳에 빨간불이 켜져 있다.

 이같은 분쟁 요인들은 냉전 시대에도 존재했으나 당시에는 동서 대치 상황 때문에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이 끝난 후 세계 다른 지력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도 국가 이기주의와 군비 경쟁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이런 갈등 요인이 하나둘씩 불거져 나왔다. 특히 이 지역에서의 미군 감축에 따른 아시아 여러 나라의 불안 심리는 이런 문제들이 표면화하는데 큰 몫을 차지했다.

 미국 정부는 기본적으로 아시아에서 미군을 감축하는 데 별 이의가 없다. 다만 미국 감축에 따른 이 지역의 힘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이냐 하는 점을 고민할 뿐이다. 미국은 중국이나 일본이 그 일을 맡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국 감축이 현실로 다가오는 상황에서 아무런 대책 없이 반대만 하고 있을 형편은 아니다. 아시아에서 미국 감축에 따른 힘의 공백을 메우면서 현재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

 최근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그 해답을 내놓았다. 그가 일본에서 밝힌 신태평양공동체 구상은 본질적으로 탈냉전후 미국이 정치·경제·안보 면에서 계속 주도권을 갖겠다는 것이다. 이 구상은 안보 문제와 관련해 이 지역에서 다자 안보기구를 창설하는 것을 지지한다. 지난 날 소련을 필두로 많은 나라들이 다자 안보기구 창설을 외쳐댈 때 이를 외면해온 미국 정부가 이처럼 태도를 바꾼 까닭은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예전처럼 단독으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방위를 떠맡기에는 재정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안보적 우위를 계속 지키면서 미군 감축에 대비한 묘책으로서 다자 안보기구를 들고 나온 것이다. 물론 이같은 기구가 생겨나도 미국은 한국이나 일본과의 군사동맹 관계는 그대로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한국은 ‘동북아 소안보기구’에 관심

 이와 관련해 미국은 기존의 아태경제협력체(APEC)를 안보기구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기구의 테두리 안에 안보 문제까지도 토의할 수 있는 포럼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한국도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아태경제협력체는 오는 11월 미국 시애틀에서 제5차 정례 회의를 연다. 이 회의에는 15개 회원국 외무장관이 참석한다. 특히 이번 회의에는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을 포함해 회원국 정상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다자간 안보기구 문제를 토의할 예정이어서 관심을 끈다.

 규정상 아태경제협력체에 참석할 대표는 회원국 외무장관이다. 따라서 대표를 정상급으로 격상하는 것은 이 기구의 성격 변화를 의미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지난 5월에 서울에서 열린 제28차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개막 연설에서 아태경제협력체 정상회담을 제안한 바 있다.

 아태경제협력체를 안보기구화하는 데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 이 기구는 회원국의 만장일치제로 운영된다. 그 때문에 회원국 간의 사전 합의 없이는 정상회담 자체가 열릴 수 없다. 클린턴 대통령이 오는 11월 시애틀 회담에서 정상 간의 비공식 모임을 주선하겠다고 했지만 실현될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우선 중국은 대만과 홍콩의 국가 원수가 이러한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 인도네시아는 아태경제협력체가 경제 문제만을 토의하자는 입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회원국 간에 완전한 합의를 이끌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안보 위협에 대한 아시아 국가 간의 인식 차이, 문화 및 역사의 다양성에서 비롯한 다자간 협력 전통의 결여 등으로 아시아 모든 나라가 참여하는 다자간 안보기구를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그 때문에 우선 참여가 가능한 나라끼리 모여 ‘소안보기구’를 출범시키는 게 현실적이다. 한승주 외무부장관은 최근 서울 외신기자클럽 회견에서 “다자간 안보체 문제와 관련해 우선은 한국·미국·일본 세 나라가 중심이 돼 추진하고 중국과 러시아는 나중에 참여시키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그의 말을 풀어 보면 아시아 전역을 상대로 한 안보기구를 짧은 기일 내에 창설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든 만큼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과 일본이 먼저 ‘동북아 소안보기구’를 만들자는 것이다.

 다자 안보기구를 설치하자는 목적은 분쟁이 터진 후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분쟁을 사전에 예방하자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예방 외교(preventive diplomacy)를 이 기구에 맡기자는 것이다. 유럽과 달리 역내 국가간에 안보 차원의 대화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는 아시아에 다자 안보기구가 생기면 대화 습관(habit of dialogue)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외교안보연구원의 李瑞恒 교수는 “다자간 안보협력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서로 되도록 많은 대화 습관을 가짐으로써 상호 안심할 수 있는 정도를 높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다자 안보기구를 통해 서로의 속셈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투명성이 어느 정도 확보될 경우 아시아에 군비통제 시대가 올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다만 동아시아 최대의 위협 요인이 되고 있는 북한이 앞으로 탄생할 다자 안보기구에 참여하느냐 하는 문제가 큰 숙제로 남아 있다.
卞昌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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