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것도 서러운데 나가라고?
  • 허광준 기자 ()
  • 승인 1993.07.2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황화탄소 중독 증세를 보이던 고정자씨(전 원진레이온 노동자)는 작년 12월 《시사저널》 취재팀과 만난 자리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온몸이 저리고 마비되는 등 중독 증세가 명백히 나타나는데도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해 생계가 곤란하다고 했다. 원진레이온에 같이 입사해 15년간 함께 근무한 남편 심상윤씨도 눈물을 보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시사저널》은 막막하고 우울한 표정의 이들 사진에 ‘죽으면 인정받으려나’라는 설명을 붙였다(제168호 참조)

죽은 지 이틀 뒤 직업병 인정받아

 지난 5월23일 고씨는 아픈 몸과 어려운 생활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씨가 직업병 환자로 인정받은 것은 죽은 지 이틀 뒤였다.

 직업병 환자를 양산해 물의를 일으켜온 인견사 생산업체 원진레이온이 결국 문을 닫게 됐다. 지난 6월8일 민자당 강삼재 제2정책조정실장과 경제기획원·재무부·상공부·노동부 및 산업은행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원진레이온 처리 대책을 위한 당정회의’에서 이 회사를 폐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강실장은 “원진레이온이 공해 산업으로 끊임없이 산재를 발생시키고, 채산성도 계속 악화하고 있어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폐쇄에 따른 퇴직금·보상금 지급 등 노동자에 대한 사후대책은 최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며, 공장 터는 일반에 매각할 방침이다”라고 밝혔다.

 이같은 결정이 내려지자 원진 노동자들은 대책 없는 폐업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원진노동조합 대표 등으로 구성한 ‘직업병 대책과 고용보장 쟁취를 위한 원진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해, 폐쇄 결정이 내려진 다음날인 6월9일 총리실에 항의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민자당·국회·정부종합청사 등에서 항의 방문과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폐업은 예정된 것이었다. 원진의 기계가 멈춘 것은 지난 5월15일부터였다. 화재가 네차례 발생한 후 회사측은 시설 보수와 안전시설 정비 등을 위해 9월 말까지 장기 휴업에 들어간다고 공고했다. 노동자들은 장기 휴업이 폐업으로 가기 위한 사전 조처가 아닌가 의심하며 노조 사무실에서 휴업 철회를 요구하는 농성을 벌여왔다. 이제 휴업 철회 농성은 폐업 철회 농성으로 바뀌었다.

 원진레이온은 국내 유일의 인견사 생산 업체이다. 59년 원진의 전신인 흥한화섬이 설립된 이래 경영난으로 68년 처음 산업은행 법정관리를 받았다. 소유권이 몇차례 이전된 끝에 81년 두 번째로 산업은행 법정관리에 들어가 오늘에 이르렀다.

 이 회사가 널리 알려진 것은 80년대 후반에 무더기로 직업병 환자가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올해 7월까지 노동부로부터 이황화탄소 중독 직업병 환자로 인정돼 요양중인 사람은 모두 2백67명이다. 중독 증상이 나타나지만 현재의 직업병 인정 기준상 환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도 70여 명이다. 원진노조나 원진레이온 직업병 대책협의회(원대협) 등 관련 단체는 앞으로 직업병 인정 기준이 완화되어 재검진을 받으면 직업병 환자가 더 많이 발견될 것으로 본다. 현재 원진에 근무하는 노동자 8백10명 중 3분의 1이 자각증세를 호소하고 있다.

 원진 노동자들과 노동부 등 정부·회사 사이에 직업병 인정 여부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가운데 이황화탄소에 중독된 노동자들은 하나둘 쓰러졌다. 현재까지 직업병이 원인이 되어 사망한 노동자는 15명이다. 그 중에는 고정자씨처럼 자살한 사람도 있다.

 폐업 결정이 내려지자 노동조합과 원대협, 원가협(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 및 가족협의회) 등 관련 단체는 폐업 결정을 즉각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도 이미 폐업은 기정사실화한 것으로 본다. 정부나 원진의 관리 은행인 산업은행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이제 급한 일은 오갈 데 없게 된 현직 노동자의 고용 문제와 새로 판정될 직업병 환자에 대한 보상 문제이다.

 정부 당국과 산업은행은 공장터 14만7천평을 공장용지에서 주택용지로 용도를 변경해 팔 예정이다. 관계자들은 서울 동부의 관문인 미금시 대로변에 위치한 공장 터가 주택지로는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쉽게 팔릴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5월말 현재 1천4백72억원에 달하는 부채를 갚고 양도세 등을 물고나면 토지 판매 대금은 남는 게 없다고 주장한다. 원대협 박무영 사무차장은 “토지 매각 대금은 산재를 해결한 대 최우선적으로 써야 한다. 원진에서 일한 전·현직 노동자 1만3천여 명 중에서 정밀 검진을 통해 직업병으로 인정받게 될 환자는 많으면 1천여 명까지 될 것이다. 이들에 대한 민사보상 금액을 미리 산정해 둬야 한다. 또한 계속적인 건강 검진과 전문 병원을 설립하기 위한 기금도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직업변 판정을 받은 원진 노동자의 3분의 2가 공장 퇴직후 직업병이 인정되었고, 증세가 22년이나 잠복됐다가 나타난 경우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직업병 환자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현직 노동자 8백10명에 대한 고용 문제도 심각하다. 당장 문을 닫으면 이들은 갈 데가 없다. 원진 노동자는 업계에서 직업병 환자로 소문나 있고, 그간의 직업병 인정 투쟁 때문에 ‘데모꾼’으로 낙인 찍혀 다른 곳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노동자는 “원진 출신이라면 취업은 물론 결혼하기도 어렵다”라고 말한다. 게다가 원진이 유일한 인견사 생산업체여서 다른 공장에 적응하려면 새로 기술을 익혀야 한다. 노조측은 노동부가 현실적인 재취업 방안을 세우고 책임을 지라고 요구한다. 그 방법으로 정부투자기관에 재취업시키고, 원하는 사람은 직업 훈련을 거쳐 새 직장을 알선하도록 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이와 관련해 노동부 안영수 산업안전국장은 “현직 근로자 둥 재취업 희망자에 대해 직업 알선이나 재취업을 위한 훈련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노조측은 구체적인 방안 밝히지 않으면 이를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같은 입장에는 ‘직업병이 뻔한데도 사람이 죽어야 인정하는’ 노동 정책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원진 노동자들은 결국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회사는 허수아비가 됐고, 실질적 관리자인 산업은행은 제대로 대화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국회 노동·재무위, 민자당 강삼재 실장 등을 찾아나서는 것은 그 때문이다.

 폐업에 따른 위기감은 생산직뿐 아니라 관리직에도 팽배해 있다. 각 공정별로 조직된 ‘대대’ 조직 중 ‘제5대대’가 그들이다.

 폐업 결정 등 회사의 운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반발하는 노동자들을 자극하는 일이 또 벌어졌다. 지난 10일 산업은행측이 퇴직금과 통상임금 3개월분에 해당하는 폐업수당 등을 받아가라는 공고문을 일방적으로 붙였을 분 아니라, 외부용역 경비원 25명을 새로 채용한 것이다. 지난 14일 공장 강당에서 열린 비상총회에서 황동환 노조위원장은 그 자리에 모인 3백여 노동자에게 회사·산업은행의 이같은 처사를 알렸다. “지금 외부 경비원들이 회사 정문에 몰려 있다. 우리 직장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이들을 몰아낼 사람 50명만 나와달라.” 앉아 있던 노동자 둥 4분의 1 가량이 앞다투어 일어섰다.
許匡畯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