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야당 통합 ‘기초공사’ 끝났다.
  • 문정우 기자 (mjw21@sisapress.com)
  • 승인 1993.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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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타산 맞아 공조 가속화… “질적 융합이 문제”

김영삼 정부의 개혁 강풍 속에서 설자리를 잃고 지리멸렬했던 야권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있다. 명주·양양의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민자당 후보를 따돌린 것에 힘입은 데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이 곳곳에서 삐걱대는 소리를 내는 것에 고무돼 ‘야성’이 되살아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특히 춘천과 대구 동을구 보궐선거를 앞두고 민주·국민·새한국당이 공조체제를 이룩하는 데 성공한 것은 야당의 입장에서는 혼돈 속에서 한줄기 빛을 발견한 것과 같다. 암담하게만 보였던 야권의 진로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명주·양양 이전의 보궐선거에서 야당이 전패하고 김영삼 정부에 대한 인기가 치솟을 때는 상대적으로 야당의 입지가 초라하게만 보였다. 민주당의 명망 있는 다선 의원들조차 다음 선거에서 당선을 장담하지 못할 처지였다. 김대중 전 대표마저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으로 떠나버려 비빌 언덕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던 것이 김영삼 정부의 개혁이 주춤하면서 활로를 찾게 된 것이다. 춘천과 대구 보궐선거에서 3당 공조체제를 구축한 것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야당통합 논의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세에 현격한 차이가 있으므로 형식은 당 대 당 통합이 아니라 민주당에 의한 흡수통합이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3당은 서로 합치는 데 대해 상당히 깊숙이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신정당도 끌어안아야 한다”
 민주당에서 야권통합을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뛰고 있는 사람은 정대철 의원이다. 정의원은 제헌철인 지난 7월17일 이기택 대표를 찾아가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야권통합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고 이대표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정의원은 그 자리에서 현재 보궐선거에서 민주당과 공동전선을 펴고 있는 국민당이나 새한국당 외에 박찬종 의원이 이끄는 신정당도 함께 끌어안아야 한다고 역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원은 이와 관련해 “국민당의 김동길 대표나 새한국당의 이종찬 대표 모두 원칙적으로 합치자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신정당 박찬종 대표도 합당할 뜻이 있는 것으로 안다. 빠른 시일 안에 야권 단일화가 성사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이들과 접촉할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정의원은 “당내에 거부 반응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타협과 양보를 통해 통합을 이루면 실보다 득이 훨씬 많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사실 국민당이나 새한국당은 민주당이 합치자고 하면 마다할 까닭이 없다. 국민당의 경우 정주영씨로부터 버림받고 난 뒤 당의 명맥조차 이어가기 힘든 형편이다. 당적을 유지하고 있는 현역 의원은 13명으로 민주당 다음으로 많지만 결속력이 약화돼 당무가 마비되다시피 한 상태이다.

 새한국당의 처지는 더욱 딱하다. 현역 의원은 대표인 이종찬 의원과 장경우 의원뿐이다. 그래서 아예 정당 활동을 포기하고 ‘21세기 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정치 연구만 하고 있는 형편이다. 두 당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밉게 보일 대로 밉게 보였기 때문에 민자당 쪽에는 눈길조차 돌리기 어려운 처지이기도 하다.

 특히 이종찬 대표의 경우는 선택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선 과정에서 거푸 무리수를 두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죽은 목숨이나 매한가지 신세가 돼버렸다.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이제는 자기 아성인 서울 종로구에서조차 당선을 장담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야권 통합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보궐선거에서의 야권공조도 사실은 이종찬 의원의 구상이었으며, 정대철 의원에게 야권통합을 위해 발벗고 나서 달라고 적극적으로 주문한 사람도 이의원이라고 한다. 이의원은 지난 6월 영국에 있는 김대중 전 대표를 찾아가 케임브리지 시내의 한 중국 식당에서 두시간동안 독대하기도 했다.

 따라서 야권통합 성사 여부는 민주당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정대철 의원이 야권통합에 대해 적극적인 것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비주류인 정의원은 현재 상태에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라는 자신의 꿈을 이룰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기택 대표가 이끄는 주류에 비해 머리 수에서 절대 열세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 인사를 영입하면 할수록 정의원의 기회는 그만큼 늘어나게 되는 셈이다.

 정의원은 이종찬·김동길·박찬종 의원과 두루 원만한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주류의 속셈을 뻔히 안다 해도 이기택 대표는 야권통합에 대한 미련을 쉽게 떨쳐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저 민주당 대통령 후보만 하고 말겠다면 모르겠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대통령일 것이기 때문이다.

보선 결과 따라 통합 속도 결정될 듯
 이대표는 현재 의욕을 갖고 대통령 후보 수업을 열심히 하고 있다. 관훈클럽 토론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초청 연설회에서 비교적 후한 평점을 받았기 때문에 무척 자신감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비서진을 김대중 전 대표가 있었을 때에 못지 않은 규모로 확대 개편했다.

 그러나 이대표가 현재 민주당의 위상을 냉정히 돌아본다면 답답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의석 수는 96석이지만, 호남과 수도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역의 당 조직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태로 대통령선거를 치른다면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차기 총선과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여세를 몰아 대통령선거에서 정권교체를 이루려면 당 조직에 대한 대수술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그런데 국민당과 새한국당은 원내건   원외건 특히 민주당이 취약한 지역인 영남·강원·충정 지역에 탐나는 인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주류와 비주류 간의 이해가 이처럼 상충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3당 합당은 멀지않아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야당공조가 보궐선거 결과에 좋은 결과를 미쳤다는 평가가 나오면 통합논의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 내에서는 이런 식으로 과거도 묻지 않고 색깔도 따지지 않은 채 통합하는 방식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반론은 김영삼 정부의 현재 개혁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출발한다. 즉 김영삼 정부의 개혁은 설계도가 없기 때문에 실패로 끝나거나 시행착오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개혁에 대한 욕구도 촉발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렇게 될 경우 개혁을 이어갈 정치 세력이 필요한데 그 때를 대비해 야권은 질적으로 대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질적 대통합이란 재야인사와 현재 민자당에 있는 개혁지향적인 인물까지를 포괄하는 이른바 민주인사 대연합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민주당내 진보정치인의 모임인 민주개혁정치모임이 ‘광범위한 민주 세력의 연대·제휴를 강화하겠다’고 선언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혁모임의 한 관계자는 “만약 질적인 대통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민주당이 설사 잡다한 세력을 끌어들여 집권한다 해도 현재 김영삼 정부 수준 이상의 개혁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반발 세력도 만만찮아
정치 성향과는 별도로 “박철언 같은 사람과 어떻게 같이 정치를 하자는 말이냐(박의원은 현재 국민당 당적을 갖고 있다)”며 우선 심정적으로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많다.

 지금 당장은 민주당내 주류나 비주류의 필요와 현실적인 영향력에 의해 야권이 물리적인 통합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총선이나 대통령선거가 임박하면 민주당 내에서는 야권의 진로를 놓고 한바탕 격렬한 논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처럼 노선과 정책에 따라 신세대 정치인들이 구세대 정치인들과 결별하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아무튼 야권은 현재 김영삼 정부의 개혁이 시작됐을 때처럼 의기소침한 모습은 아니다. 야권 주요 인사들은 나름대로 정권교체 가능성을 확인하고 각자의 사고방식에 따라 진로를 놓고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가 야권 분열이 될지 통합이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여당의 독주를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다는 오기와 기력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文正宇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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