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단계 금리자유화 11월이 ‘손없는 달’
  • 장영희 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1993.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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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호조·자금 비수기 등 조건 맞을 듯

지난 7월 20일 아침 7시 20분, 서울 역삼동에 있는 한국은행 강남지점 회의실. 이른 아침의 냉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좌중을 휩쓸었다. 11명이 모인 이 날 모임 주제는 ‘2단계 금리자유화후 효율적인 공개시장 조작 방법’이었다. 한 참석자가 현재와 같은 방식에 머물면 자유화 이후 통화관리가 더 힘들 것이라고 걱정을 털어 놓았다. 다른 참석자는 공개시장 조작에 쓸 대상채권을 넓히고 팔 기관도 은행뿐 아니라 제2금융권으로 넓히자고 제안했다. 이같은 자유토론은 1시간 넘게 계속됐다. 금융 전문가가 아니라면 알아듣기 어려운 내용을 가지고 설전을 벌이는 이 모임은 ‘금융정책실무협의회’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데, 이 날로 네 번째 열렸다. 모임 주체는 금융정책 수립과 집행의 양대 산맥인 재무부와 한국은행이다.

 이들은 매주 화요일에 정례 회동을 갖고 통화·금리 지표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살핀다. 중장기 과제 목표는 금융 구조를 선진화할 대안 제시에 두고 있다. 모임 성과에 대해서는 건설적이라는 평가를 듣는데, 가령 최근의 금리 상승에 대해 왜 오르는가에 대한 원인 분석은 주로 한국은행이 맡고, 이같은 금리 교란 요인을 제거하는 해결사 노릇은 재무부가 하는 식으로 운용되기 때문이다.

 이들이 다루는 주제에는 2단계 금리자유화 문제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재무부의 한 관계자는 “이 모임이 세간에 알려졌듯이 금리자유화 준비팀은 아니다”라고 부인하면서도 2단계 금리자유화 시행을 앞둔 상황에서 해야할 중요 작업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2단계 금리자유화는 현안 중의 현안으로 이제 시간 읽기에 들어갔다. 홍재형 재무부장관은 지난 6월 《시사저널》(제193호)과의 인터뷰에서 “반드시 연내에 실시하겠다”라고 밝혔다. 이 공언은 대외적인 약속이기도 해 한국 밖의 땅에서도 지켜보는 눈길이 따갑다. 실시 시기를 불과 5개월 남짓 남겨두고 있어 촉박하기도 하지만, 한번 실패한 경험이 있는 정부로서는 이번에는 성공시켜야 한다는 절박감에 휩싸여 있다. 재무부 유지창 금융정책과장은 “88년은 돌아올 수 있는 강을 건넌 셈이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2단계 금리자유화 시행은 돌이킬 수 없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라고 과천 청산 분위기를 전했다.

시기 잘못잡은 88년말 실패 ‘교훈’
 한국 금융 사상 처음 단행한 88년 12월의 금리자유화는 겨우 3개월 만에 다시 금리규제로 퇴행했다. 실시 시기를 잡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88년 말은 경기가 가라앉은 시점이었고, 부동산 값이 폭등세로 치닫는 상황에서 돈을 풀었기 때문에 물가가 다락같이 올랐다. 한국 경제는 ‘불황 속 물가불안(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최악의 늪에 빠져들었다.

 이 때의 뼈아픈 실패는, 수업료는 비쌌지만 실시 시기가 중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번 2단계 금리자유화도 언제 실시할 것이냐가 최대 관심사다. 일반적으로 금리자유화는 경기 곡선이 호황 국면에 접어들고, 돈 수요가 많지 않은 지금 비수기이며 물가가 안정될 때가 최적 시기로 거론된다.

 한 금융 전문가는 남은 5개월 중에 이 조건을 가장 많이 충족시킬 시기로 11월을 꼽았다. 그 근거는 이렇다. 9월에는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본격화할 것이고 게다가 월말에 한가위가 끼여 있는 등 자금 성수기이다. 돈 수요가 많아지면 금리가 오를 터이고 금리상승을 막기 위해 한국은행은 돈을 더 풀 것이다. 자금 성수기를 벗어나면 한국은행은 반대로 시중의 돈을 거둬들이려고 할 것이다. 서서히 죄긴 하겠지만 통화목표량을 맞추기 위해 죄는 일만은 어쩔 수 없다. 이 때는 정부가 물가에 가장 신경을 쓸 때이다. 따라서 9~10월에 금리자유화를 단행할 공산은 극히 적다. 8월에 실시할 수도 있겠으나 이 때는 김영삼 정부가 늘어나기를 고대하는 기업들의 투자가 아직 눈에 드러나지 않아 금리자유화보다 금리인하를 유도해야 할 판이어서 부적절하다. 그래서 11월이라는 시기가 나온다. 남은 12월은 연말이라 자금 수요가 폭증할 때이다. 핵폭탄에 비유될 수 있는 금리자유화를 단행하기에는 정부가 매우 부담이 클 것이다. 11월은 통화와 금리, 성장과 물가의 틈새에서 금리자유화라는 유기체가 가장 생명력을 얻는 시기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예측은 설득력이 없지 않다. 하지만 시기 결정은 이와 다르게 움직일 수 있다. 정부는 경제 회복과 저금리를 동시에 이루려고 노력하지만 둘의 관계는 곧잘 상충된다. 경기가 들뜨기 시작하면 금리도 덩달아 오르는 경향이 있다. 재무부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와 경제팀 수뇌부가 무엇을 우선 순위로 선택하냐의 문제이다”라고 말했다. 시기 선택은 전적으로 이들의 몫이라는 얘기다.

 정치적 동기도 무시할 수 없다. 김영삼 정부는 단기 경기부양책으로 1백일계획이란 카드를 썼으나, 이 계획으로 경기가 좋아졌다는 데는 이견이 많다. 더욱이 6월 말에 성안된 신경제 5개년계획은 장기 계획이므로 당장 손에 잡히는 성과가 없을 수밖에 없다. 무엇하나 뚜렷한 변화가 감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2단계 금리자유화는 개력의 신호탄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경제 상황과는 거리가 있어도, 정치 입장을 반전시킬 계기로 일시에 단행할 공산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 금리 모니터링제도 도입 등 준비
 1단계 금리자유화 조치는 91년 11월에 단행됐다. 하지만 1단계는 자유화 정도가 극히 미미하다. 은행의 모든 여신 중 10%, 수신은 13%만이 규제에서 풀린 것이다(제2금융권은 여신 23%, 수신44%).

 금융기관과 이용자가 금리자유화를 덜 실감하는 현상은 자유화 폭에도 원인이 있지만 실제 상황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7월21일 재무부 이재국에 한 단자회사 임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정부가 최근 기업어음 할인 금리를 자유화했으므로 금리를 어느 선에서 결정해야 정부의 의중을 맞출 수 있을까를 탐색하려는 의도였다. 이 관리는 ‘정말 자유화됐다. 규제  안하니 알아서 하라’고 나무랐으나 이 임원이 전화를 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기업어음 할인 금리는 91년 11월에 제도상 자유화됐으나 실질적으로 자유화된 것은 최근 일이다. 정부가 자유화해 놓고도 금리 상환선을 정해 묶은 행정지도를 해온 것이다. 이같은 정부와 금융기관 간의 ‘통정’은 그나마 자유화된 폭마저 줄이는 결과를 가져와 자유화에 대한 무감각 증세를 깊게 했다.

 한국은행이 92년말 금융기관의 여·수신 실적을 기준으로 추산한 바에 따르면 2단계 금리자유화에서는 은행 여신의 64%, 수신은 37%를 은행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제2금융권은 여신의 99%, 수신은 60%가 자유화돼 상당한 수준의 금리 자유화가 이루어진다. 정부가 금리규제로 역행하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하고 있는 터여서 2단계 금리자유화는 한국인에게 ‘보이지 않는 손(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한 금리 결정을 실감하게 할 것이다.

 금리자유화에 대해 정부가 떨쳐버리지 못하는 망령은 금리 상승에 대한 걱정이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금리가 상승할 공산이 크지만 그 정도가 심각할 것이라고 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한국은행 김영대 자금부장은 “2단계 자유화의 내용을 보면 저축금리(수신)를 대출금리(여신)보다 소폭 조정했고 경제여건이 과거보다 좋기 때문에 큰 부작용을 빚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내다봤다.

 재무부 김영섭 이재국장은 설사 신체(경제)가 면역성(충격 흡수능력)이 떨어지는 탓에 몸안에 파고든 바이러스(금리자유화)를 못이겨 열(금리 급변동, 주로 급등)이 오르더라도 이겨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금리 모니터링제도 도입, 공개시장 조작 등 정교한 간접관리 수단을 강구하는 등 예방주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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