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로부터 출교당하기도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3.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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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지지자의 10년 ‘恨’
여수 ‘충현교회’ 세운 백의장씨…“편지 교류로 각종 송사 휘말려” 주장
 김영삼 대통령이 다니는 충현교회가 충무로에 있을 무렵인 79년 6월, 전남 여수에 사는 白義丈씨는 같은 기독교인인 ‘김영삼 장로’를 만나러 무작정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나 그는 김장로를 만나지 못했다. 대신 그는 충현교회라는 이름을 여수로 갖고 내려갔다. 당시 여수에서 종업원 2백명 규모의 수산업체 천우수산을 운영하던 그는 79년 12월 여수에다 이름이 같은 충현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그는 그 교회의 장로가 됐다.

 여수 충현교회 백의장 장로는 서울 충현교회 김영삼 장로 앞으로 계속 ‘하늘이 군사독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소식이 없다가 80년 5월 처음으로 회답이 왔다. 김영삼 장로가 상도동에 갇혀 있을 때였다. “…이 나라가 이토록 어렵고 비극적인 시대가 되어버린 점,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죄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온 국민과 함께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교제가 이미 열렸습니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장로는 백의장씨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주로 ‘김삼영’이라는 가명을 썼다. 백씨는 “아마 상도동에 갇혔을 때 내 편지에 답하게 된 것 같다”라고 추측한다. 서신 검열에 걸릴 것을 우려한 백씨는 편지를 띄울 때 반드시 서울 충현교회로 보냈다. 부인 손명순씨가 편지를 챙겨 상도동으로 가져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영삼 장로가 백씨에게 보내온 서신 중에는 더러 신민당사에서 만들어 쓰던 편지 봉투가 섞여 있었다. 그 편지 겉봉에는 ‘新民黨 總裁 金泳三’이라는 글자가 인쇄돼 있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때부터 백씨는 온갖 송사에 휘말리게 되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 지역 공화당원 박○○씨가 백씨를 여러차례 찾아와서 “야당만 편들지 말고 우리에게도 선거자금 좀 내놓으라”고 야단이었다. 송사는, 두사람이 멱살을 잡고 승강이를 벌이다 백장로가 덤벼드는 상대방의 손을 뿌리친 게 발단이 되었다.


 상대방이 상해죄로 고소해오고, 백씨는 무고라며 맞고소하고…. 이렇게 시작된 송사는 80년대 내내 백씨의 생활을 망가뜨렸다. 그 와중에서 그의 회사가 쓰러졌다. 어느날 수출하려고 쌓아둔 물건에 가압류 딱지가 붙은 것이다. “가압류 딱지를 붙인 장본인도 이지역 여당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사태를 수습하고 난 뒤에는 이미 회사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모든 게 헝클어지게 된 까닭을 요즘 백씨는 김영삼 장로와의 서신 교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지역의 여당 조직과 관이 입을 맞춘 듯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백씨 회사에 가압류 신청을 낸 사람은 나중에 무려 10가지 죄목으로 구속됐다. 그래서 개인적인 일이지만 6공 시절 백씨 사건은 국회 법사위에서도 문제가 됐다. 억울하지만 백씨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교회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세상은 백씨를 가만두지 않았다. 백씨는 89년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로부터 출교당했다. 교회재산을 착복했다는 명목이었다. 그가 출교당하고난 후 교회 이름도 해변교회로 바뀌었다. 백씨는 충현교회를 되찾기 위한 송사에 들어갔다. 가뜩이나 지역사회에서 ‘미운 털이 박힌’ 그에게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갈 리 없었다. 세월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백씨는 10여 년을 송사에 매달렸다. 그는 모든 게 김영삼 장로와의 서신 교류에서 비롯됐다고 믿는다.
吳民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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