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과 경찰은 ‘따로국밥’
  • 김당 기자 ()
  • 승인 1993.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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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가 노태훈씨 억지 구속…비밀영장·꿰어맞추기 수사 여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국가보안법이 경찰의 불법수사 간행을 계기로 또다시 나라 안팎에서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최근 한 인권운동가의 구속과 관련해 국내 변호사들이 관련 경찰을 고발하고 세계 각국의 주요 인권단체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는 등 이를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제 인권단체뿐 아니라 외국 언론도 이번 사건이 이른바 문민정부 출범 이후 재야 활동가에 대한 첫 구속사건이라는 점에 비상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하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간사로 활동했던 노태훈씨(29·유엔 세계인권대회 민간단체 공동대책위원회 및 인권 운동 사랑방 상근자)가 처음 구속된 때는 지난 7월13일 아침 6시였다. 노씨는 ‘사랑방’사무실(서울 종로구 돈의동)에서 잠을 자다 서울시 경찰청 보안4과 직원이라고 신분을 밝힌 경찰 4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구속 사유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였다.

 경찰은 이 날 노씨뿐만 아니라 노씨와 교류가 있는 권낙기씨(전 민가협 공동의장) 류낙진씨(광주시 거주·장기복역 출소자) 등 7명에 대해 동시다발로 압수수색을 실시하면서 이들을 모두 참고인 자격으로 연행했다. 경찰은 또 이 날 노씨의 집과 노씨가 사무국 차장으로 있는 민족건강회 사무실, 그리고 장기수 출신 출소자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운영하는 민중탕제원(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동)에 대해서도 압수수색을 실시해 압수목록을 작성하지 않은 채 장기수 출신 출소자들의 회보인 《빼앗긴 세월을 되찾기 위하여》를 비롯한 책자와 자료, 장부 등 수백점을 압수했다.

 그러나 이같은 대대적인 검거와는 달리 경찰은 정작 다음날 오후 9시께부터 연행자들을 모두 석방했다. 물론 노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형사소송법상 참고인 조사 시한인 6시간을 훨씬 초과한 뒤였다. 이처럼 불법·집단적인 인신 구속이 이뤄졌음에도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것은 경찰의 보도통제 요청 때문이었다. 경찰청은 7월13일 오후 출입기자들에게 “3~4일만 기다려 달라. 확실하게 보여주겠다. 노태훈이 일본에서 김정일과 연결된 확실한 물증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엠바고를 요청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같은 장담과는 달리 뚜렷한 혐의점을 찾지 못한 채 아무런 해명도 없이 노씨를 포함한 8명을 모두 석방했다.

 대부분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간 이들이 남영동 대공분실 등에서 조사받은 내용은 주로 ‘조총련과 연계된 이적단체 결성 및 금품수수’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이 조사받은 내용을 종합하면 경찰은 ‘일심회’라는 조직과 ‘해외담당 노태훈, 국내담당 권낙기’라는 조직표를 그려놓고 수사를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낙기씨 등 연행자에 따르면 경찰은 △재일 동포 장기수 출신의 이 철씨와 서승·서준식 형제와의 관계 △지난해 5월부터 올1월까지 일본 5개 도시에서 열린 ‘한국 양심수가 마련한 서화전’과 관련해 노씨가 서화전 개최에 관여하면서 문익환 목사 방북을 주선했던 정경모씨와 사진작가 마키타씨와 접촉한 내용을 집중 추궁했으나 뚜렷한 혐의점을 찾지 못해 모두 석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경찰은 석방 하루 만에 변호사 사무실에서 노씨를 다시 강제 연행했다. 조용환 변호사(덕수합동법률사무소) 등에 따르면 경찰청 대공분실 소속 경찰관 7명이 구속 사유도 밝히지 않은 채 구속영장(사본) 겉장만 가지고 와 연행을 시도했고 조용환·백승헌 두 변호사가 이를 막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여졌다. 두 변호사는 곧장 강제 연행에 참여한 수사관 7명을 불법 체포 및 감금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고발했다. 한편 경찰청은 노씨를 재연행한 다음날 기자실에서 ‘노태훈씨 국가 보안법 위반사건’에 대한 수사를 발표했다. 혐의 내용은 주체사상과 북한 통일노선을 찬양하는 ‘이적표현물’ 《빼앗긴 세월…》 제2, 3호를 입수·탐독한 것과 출소 장기수 및 재야단체 회원을 중심으로 ‘일심회’라는 친북한 운동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공수사기관들의 경쟁이 낳은 무리수”
 그러나 관련자들은 한결같이 “일심회라는 이름은 경찰에서 처음 들은 이름”이라고 부인하고 있다. 노씨 또한 이오영·천정배 변호사와의 접견에서 △경찰이 조총련과 연계된 것으로 보는 마키타씨와는 그가 지난해 한국에서 개최한 전시회(‘양심수의 어머니들…’)를 도와준 인연으로 일본에서 ‘양심수 서화전’을 할 때 만났을 뿐, 조총련 관계는 알지 못하며 정경모씨는 서화전에서 처음 만나 수인사를 나누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은 이적단체 조직과 관련해서는 뚜렷한 혐의점을 찾지 못한 채 지난 7월23일 노씨를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로 서울지검에 구속송치했다. 국내외 인권 및 재야 단체들이 분개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즉 수사 당국이 확증도 없이 마구잡이로 수사에 나섰다가 소득이 없자 꿰어맞추기식으로 노씨의 구속을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염규홍씨(사랑방 상근자)는 “노씨가 인권운동가로서 경찰의 강압적 수사에 잘 대처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또 하나의 조직 사건이 만들어져 ‘간첩’으로 둔갑할 소지가 컸다. 이는 사실상 비밀영장의 관행이 계속되고 있고 언론도 조직사건이라면 무조건 보도통제를 수용하는 탓이다”라고 지적했다. 한편 재야 일부에서는 이번 사건을 ‘대공수사기관 사이의 경쟁이 빚은 무리수’로 파악한다. 이번 사건은 김대통령이 지난 5월 반공 의식의 결여를 지적한 뒤 기획되었으며, 이는 경찰이 노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인권회의 참석 전에 구속하려다 모양이 좋지 않아 이제야 구속했다”라고 말한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모양’은 여전히 좋지 않은 상태이다. 특히 국제 인권단체들은 유엔 인권회의에 참석한 인권운동가를, 한국을 포함한 1백80개국 정부 대표들이 모여 채택한 ‘비엔나선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정당한 영장도 제시하지 않고 폭행을 가해 체포하는 등 도대체 한국 정부도 서명한 ‘비엔나선언’의 내용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다. 국제사면위원회·아시아워치·케네디 인권재단·일본 세계인권회의 NGO연락회가 최근 김대통령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 “유감스럽게도 한국 내에서 인권침해를 종식하고 법에 의한 통치를 완전히 회복하려는 새 정부의 의지에 대하여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워싱턴 타임스><마이니치 신문>도 한 개인의 구속사건에 대해 이례적으로 “한국의 법체계에서 재외 한국인이나 외국인이 북한의 간첩이 아니라고 인정되는 유일한 증거는 해외 한국영사의 증명서이다”라고 보도해 잘나가던 문민정부의 위신에 흠집을 냈다.

 따라서 검찰이 국제적 망신거리가 된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관심거리다. 현재 노씨의 유죄를 입증할 유일한 증거는 《빼앗긴 세월…》뿐인데 이 책자는 이미 2년 전부터 유포된 것으로 민중탕제원 등에서 5백여 권을 압수했던 경찰조차 이를 되돌려주었다. 이 책이 정말 이적표현물이라면 경찰의 직무유기가 성립되는 셈이다. 설령 이적표현물이라 하더라도 정작 이를 ‘제작·배포한 자’는 놓아두고 ‘소지한 자’만 문제삼는 것은 법집행의 형평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래저래 검찰은 ‘뜨거운 감자’를 문 셈이다.
김 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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