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 공개 ‘한파’에도 금융시장 혼란 없다
  • 장영희 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1993.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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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 실사 불가능…‘악영향설’은 유포된 것

 한 재벌 총수는 돈의 생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돈은 햇빛을 싫어한다. 돈이 자기 증식 운동에 의해 생산성을 높이는 쪽으로 흘러가 부의 증대에 기여하게 하려면 지나친 노출을 요구해선 안된다. 완벽한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데는 부합할지 몰라도 돈으로 하여금 더욱 숨어들게 해 경제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금융실명제 실시가 거론될 때마다 이같은 돈의 생리는 그 실체보다 불어나 돌아다녔고 곧잘 실명제를 반대하는 이유로 꼽혔다. 노출을 꺼리는 게 돈의 생리이므로, 물리적으로 들추어내려고 하면 금융시장에 대혼란을 가져온다는 게 여기에 동원되는 논리다. 이 그럴듯한 얘기는 공직자 재산 공개에도 어김없이 따라붙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다.

 김영삼 정부는 지난 6월11일 ‘개혁’이란 부모 슬하에 ‘공직자윤리법’이란 옥동자를 두는 데 성공했다. 이 법에 따라 3만3천여 공직자는 8월21일까지 자신 명의의 재산은 물론 부양하고 있는 직계존비속의 재산을 등록해야 한다. 한 가구의 기준을 4인으로 할 때 등록 의무자는 10만명을 훨씬 웃돈다. 이 가운데 공개 대상자(1급 이상 고위 공직자) 수는 6천9백75명(가족을 포함하면 약 2만7천명)이다. 공개 대상자의 재산은 9월11일까지 국민앞에 공개되고, 3개월 후인 12월11일까지 실사를 받게 돼 있다.

 실사는 법에 따라 구성될 2백95개 윤리위원회(위원은 총 1천6백15명)가 필요하다면 할 수 있게 명시 돼 있다(8조). 금융시장에 대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는 위기 의식은 실사 방법을 두고 논란을 벌이는 틈새에서 불거져 나왔다. 법 취지에 따르려면 전수조사가 돼야 하고, 단순히 진위 여부를 가리는 데 그치지 않고 추적조사까지 해야 공직자 윤리법이 제 구실을 하게 된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면서부터였다. 위기 의식은 이에 대한 일종의 방어 논리로서 나온 것이다.

 학회 기금을 관리하는 한 학자는, 최근 단자사 창구에서 말로만 듣던 돈 흐름의 이상 징후를 확인했다. 1억원을 인출하려고 간 그에게 단자사 창구 직원이 ‘현금으로 드릴까요’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이는 억대나 되는 큰 돈을 수표가 아닌 현금으로 달라고 요구하는 고객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현금 통화를 통화량(M1)으로 나눈 현금통화비율은 6월말 현재 1년 전에 비해 4.7%포인트가 높아진 35.6%나 됐다. 현금이 2조원이나 늘어난 것이다.

예금 이탈 현상 없어
 그러나 시중에 현금이 늘어난 현상에 대해서는 ‘신중한’해석이 많다. 금융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현금통화 비율이 높아진 것은 사정과 재산 공개 여파가 밀려든 탓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지난 2월부터 은행들이 자기앞수표에 수수료를 받기 시작해 고객들이 수표보다 현금을 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금융권의 예금동향을 봐도 확연히 잡히는 것은 거의 없다. 우선 예금잔액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금융시장 혼란의 현상으로 흔히 꼽는 예금이탈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예금을 인출해 숨기기 쉬운 장기채권을 샀을 공산은 크다. 하지만 이 돈은 소유자 얼굴을 바꿔 다시 금융권에 돌아오기 때문에 예금 감소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다고 한국은행 자금부의 한 관계자는 분석했다.

 재산 공개 파장이 두드러진 부문은 증권시장으로 추측된다. 올들어 7월말까지 12만여개의 증권계좌가 투자자의 요청에 따라 폐쇄됐다. 대신증권의 한 부장은 “시장이 침체에서 벗어난 덕분에 원금을 확보한 투자자들이 계좌를 폐쇄한 경우가 꽤 있긴 하겠지만 12만개나 된다는 것은 사정과 재산 공개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고밖에 볼 수 없다”라고 해석했다.

 재무부의 한 국장은, 하지만 이런 미세한 돈의 흐름은 금융시장에 충격을 줄 정도의 수준은 아니며, 설사 영향이 크다 하더라도 공개 전에 한정되지 공개 후에도 계속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공직자가 불안한 마음에서 재산을 숨기려 들면 사전에 손을 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등록 대상자인 경제기획원의 한 과장은 공직자 윤리법의 법 취지상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말은 과장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이 법은 과거 비리를 들춰내는 게 목적이 아니다. 이번 첫 등록의 의미는 앞으로 등록 대상자의 재산 증감을 파악하는 기초 자료를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공직자들이 비정상으로 재산을 불리는 행태에 쐐기를 박는 구실을 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과거 비리 들춰내는 게 목적 아니다”
 공직자 재산 공개 여파에 대한 평가가 과장돼 있다는 측면은 현실적인 고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전수조사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우증권의 한 부장은 “은행은 몰라도 제2금융권은 전산망 구축이 잘 안돼 있으며 변칙거래가 많아 일일이 현장 확인을 하지 않고는 뒤엉킨 실타래를 풀 수 없다”며 전수조사가 실시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은행감독의 한 국장도 “감독 기관과 금융기관이 최대한 협조한다 해도 물리적으로 전부 조사할 수 없으며, 한다 해도 큰 의미가 없다”라고 말했다. 실명제가 안돼 차·가명이 합법적으로 인정되는 상황에서 돈을 은닉하려면 이 계좌에 넣어둘 터이고, 이를 들춰내는 데는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정부 역시 전면 실사에 동원할 인원과 예산이 책정되어 있지 않다.

 청와대 김영수 민정수석비서관은 “재산 등록 대상 3만3천명에 대한 계좌 조사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공개 대상자 6천9백75명의 경우도 의심스러울 경우 한정적으로 실시하게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결국 전수조사는 실현불가 판정이 난 것이고, 등록 내용이 수상쩍은 대상자에 국한한 선별조사를 실시할 수밖에 없다.

 경제기획원의 한 국장은 “재산 공개가 경제에 큰 영향을 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금융시장 대혼란’운운은 상당히 깊은 강도의 실사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터져나오는 사회적 요구를 틀어막기 위한 의도에서 유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張榮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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