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적 친일 매도, 그만둬라”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3.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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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평론가 오광수씨, 이태호 교수의 ‘운보는 친일파’주장에 반론

다음은 《시사저널》 제197호에 실린 이태호교수의 ‘운보의 병사 그림은 명백한 친일’에 대한 미술 평론가 吳光洙시(한국 미술평론가 협회 회장)의 반론이다. <편집자>

 이태호씨가 ‘운보 친일파 주장, 뚜렷한 물증 없다’(《시사저널》 제196호)라는 기사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한 글 말미에 ‘이 문제는 한 개인의 명예를 손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청산해야 할 냉엄한 역사적 과제이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그런데, 이 반론뿐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여러 곳에 발표한 글들(반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나온 《친일파 99인》, 《근대한국미술 논총》의 <1940년대 초반 친일미술의 군국주의적 경향성>, 《가나아트》 91년 7·8월호의 <친일미술인의 몇날 작품사례>)을 보면 ‘청산해야 할 냉엄한 역사적 과제’를 풀기 위한 의도라기보다는 다분히 인신 공격과 특정인의 명예를 손상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가령 金基昶에 대한 글을 보면, 최근 雲甫 전집 발간을 두고 ‘그 간행위원회에 참여한 문화·미술계 위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역시 김기창의 정치력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알 수 있다’에서 과거 김기창의 활동 전체를 못마땅하는 투로 ‘또한 왕성한 활동으로 상복도 많아…관민단체의 상을 두루 받았다’ ‘한편 화단과 사회활동도 국제적이어서…’ ‘또한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초상화나 기록화 제작을 도맡기도 하였다’와 같은 대목들로 점철되고 있다.

 여기 못지 않게 작품 해석에서도 다분히 자의적이고 왜곡된 것이 많아, 친일 문제라는 역사적 과제를 해결한다는 엄숙한 자리에서는 도무지 적격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작품 해석 중 몇 대목만 참고로 옮겨본다.

 ‘<총후 병사>…휴식을 취하는 병사의 옆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얼굴과 주먹 쥔 손에는 성전에 참여한 멸사봉공의 굳은 의지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모임>은 마을 부녀회의 반상회 광경을 연상시키는데, 전시 후방에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작품에 대한 해석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 누구나가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토대로서 말이다. 위와 같은 해석이라면, 어떤 작품이든 친일이란 틀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추측·상상으로 작품 해석해서야…
 당시 문화계 인사들의 친일부역 행위가 자의든 타의든 결과적으로 친일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雲甫 자신이 고해성사의 심회로 과오를 참회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사상적 매국 행위는 없었다”라고 한 말은, 당시 상당수 미술가들이 타의적인 부역 행위에 참여한 것일뿐 자발적·의도적 친일 행위를 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고, 운보의 주변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점은 타당성을 지닌다. 친일로 매도되는 네 작품 가운데 한 점(<모임>)을 제외하고는 전부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삽화류이다. 작품의 성격이나 내용을 의도적 친일행위의 증거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미술은 구체적인 작품을 놓고 실증적인 태도로 접근해가야 한다. 미술사학이나 비평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추측이나 상상으로 해석하거나 특정한 유형 속으로 몰아넣는 행위는 연구자로서 옳은 태도가 아니다. 자기들의 이념에 맞지 않거나 동조하지 않으면 덮어놓고 반동으로 몰고가는 태도는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여기 그 한 예를 들어보자.

 ‘…그런데 이런 화풍의 변모는 개인적 갈등과 창작 욕구에 의한 것이지만, 실제는 해방후 우리 미술계에 물밀 듯이 답습한 데 불과하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화풍에 매몰되었듯이 해방 후에는 서구 제국주의 미술에 기대어 자기 회화 세계를 변모시켜낸 결과이다.’

 모더니즘의 조형 논리가 바로 서구 제국주의의 미술이란 등식 관념도 관념이려니와 도대체 운보의 해방후 작품 편력을 이같은 논리로 몰아칠 수 있는 것인지. 국수적 스놉의 가공할 논리의 횡포에 그저 아연할 뿐이다. 여기에 발맞추어 신경득은 ‘일본 제국주의의 화풍을 배워 친일을 일삼던 김기창은 광복 후에는 서구 제국주의의 화풍을 이 땅에 유포하였다’라고 썼다. 이런 무지가 버젓이 횡행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답답할 뿐이다.

‘전방위’ 문화誌 계간《상상》첫선
 새로운 문학계간지 《상상》이 이번 가을호를 창간호로 첫 발을 내디뎠다. 도서출판 살림이 발행하는 이 계간지는 문학을 중심으로 영화 비디오 대중음악 등 문화의 전영역을 탐사하는 리뷰지이다. ‘문학의 새로움, 문화의 새로움’을 기치로 삼아 ‘모든 문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감싸안는 상상력’으로 변혁기의 문화적 갈망을 담아내는 그릇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잡지는 한국 사회를 둘러싼 겹겹의 경계, 예컨대 현실과 이상, 문학과 철학, 세대와 세대,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 질서와 혼동, 이성과 광기 등 모든 경계를 트고 소통시키려 한다. 즉 상상의 위력을 통해 문명의 야만적 혼돈 상태, 문화의 천박한 상품화에 저항해 나아가는 것을 편집 철학으로 삼고 있다. 문인 이문열·황지우·이창동, 영화감독 박광수 씨가 자문위원, 문학 평론가 진형준씨가 편집인, 소설가 주인석씨가 편집장을 맡고 있다. 창간호는 신세대 문학을 조명한 <새로운 문학의 문을 두드린다>를 특집으로 올렸고, 문학과 비디오에 대한 리뷰, 음식과 20년 전의 문화풍속을 조명한 분석적 에세이, 박광수 안성기 문성근 이창동 씨 등의 좌담, 박완서 황지우 윤후명 씨의 신작 등을 실었다.
李文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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