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한의 눈물’ 닦아준 두 일본인
  • 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3.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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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언도까지 받았던 이학래씨의 현직은 ‘同進交通’ 전무이다.

이 회사는 스가모 형무소를 출소한 후 갈데 없는 B·C급 전범들이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같이 전진하자”는 뜻에서 60년에 설립한 택시 회사이다. 택시 10대로 출발했던 조그만 회사가 지금은 66대인 중견회사로 성장했고, 85년 주주가 대폭 교체됐지만 아직도 한국인 B·C급 전범들의 손때가 한처럼 배어 있는 회사이다.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된 B·C급 전범들을 석방하기 시작한 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한 52년부터였다. 그러나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낸 석방청구는 기각되었을 뿐 아니라 면회오는 사람 한명 없었다. 더욱이 석방이 개시된 54년 겨울, 한국인 출감자 두 명이 생활고와 신병을 비관해 자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석방을 한달 앞둔 박창호씨(전남 광양 출신)는 이에 충격받아 출소를 거부했다. 일본 정부에서 지급하는 군복 몇벌과 교통비 1천여 엔으로는 나가보았자 거지가 되어 동사할 것이 뻔한데 왜 나가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출소할 테니 형무소측에서 주택을 알선해주고 7만엔을 빌려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일본 정부의 선처 약속에 따라 그는 몇 달 뒤 출소했으나 약속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이 일은 분개한 윤동현·김창호 씨가 연달아 출소를 거부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때 스가모 형무소에 남아 있던 한국인 B·C급 전범들은 향수회·한인회라는 기존 친목단체를 55년 4월 同進會로 통합 변경하고, 同生同進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동진회 회원들은 몸이 밑천인 운수업에 뛰어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문제는 자본이었다. 이 무렵 그들은 이마이 지분(今井知文)이란 한 일본인 독지가를 만났다. 이마이씨는 이비인후과 의사로서 아는 승려를 통해 스가모 형무소를 드나들고 있었다. 일본인 전범들을 위문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같이 수감되어 있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이마이씨는 큰 충격을 받고 그후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이마이씨는 60년 ‘동진교통’ 설립 자금의 일부인 2백만엔을 아무 담보 없이 빌려 주었다. 그의 부인 역시 동진회 회원들의 국회청원 때나 가두 시위에 빠짐없이 참석해왔다. 이학래씨는 “이마이씨는 동진회 회원들의 평생 은인이나 다름없다. 91세인 이마이 옹이 결심재판이 열릴 내년 말까지 제발 건재해 주기를 빌고 있다”라고 말했다.

 게센 여자대학의 우쓰미 교수도 동진회 회원들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동진교통이 설립될 무렵 와세다 대학 박사 과정에 있었다. 이때 신문 보도를 통해 한국인 B·C급 전범들의 존재를 처음 안 우쓰미는 친구 마쓰이 야요리(松井耶依·현〈아사히신문〉 편집위원)와 함께 동진교통을 찾아왔다. 이후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 연구의 권위자로서 《한국인 B·C급 전범》이란 책을 발간하는 한편 이번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의 대표직도 맡고 있다.

 동진회 회원 7명이 원고가 된 이 소송의 9회 공판은 10월18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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