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시아누크의 노선보다 진한 우정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3.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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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처음 인연…정치적 목적이 친구 관계로 발전

노로돔 시아누크 전 캄보디아 국왕(71)은 7월20일, 올해도 어김없이 평양을 방문했다. 65년 첫 방문 이래 지금까지 약30년 동안 거의 한 해도 빼놓지 않은 북한행이라 국내의 언론은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방문은 시아누크에게 특별한 감회를 줄 것 같다. 두차례나 권좌에서 쫒겨나 20년 동안 북경과 평양에서 식객 노릇을 하던 그가 금년 5월 총선 이후 마침내 캄보디아의 전권을 장악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떳떳하게 김일성 북한 주석과의 남다른 우정을 세계에 과시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사람의 첫 인연은 65년 인도네시아 반등에서 열린 비동맹회의에서 맺어졌다. 이 자리에서 시아누크는 아직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북한과 중국을 적극 지지해 주었다. 미국이 세계를 움켜쥐고 있던 당시 분위기에서 캄보디아처럼 작은 나라가 중국과 북한을 승인하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김일성과 주은래는 이 신세를 잊지 않았다. 그 해 10월 4일 시아누크가 처음 평양을 방문하자 김일성은 군중대회까지 열어 대대적으로 그를 환영했다. 김일성의 새 부인 김성애가 북한 언론에 공식 등장한 것도 이 때가 처음이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시아누크가 70년 3월18일 미국의 사주를 받은 론 놀의 쿠데타로 권좌에서 축출되고부터이다. 베트남전을 치르고 있던 미국은 철저한 등거리 중립외교를 펼치는 시아누크대신 친미 우파정권을 원했다. 망명길에 오른 시아누크에게 북한은 王家에 걸맞는 예우를 해 주었다. 북경에서 그는 2차 세계대전 전에 프랑스 대사관으로 쓰이던 건물에서 지냈다. 그 건물은 북경에서 가장 좋은 저택이었다.

 김일성은 몇 달 동안 군인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저택인 금수산 의사당을 본뜬 ‘궁전 같은 저택’을 지어 주었다. 전 《뉴스위크》동경 지국장 버나드 크리셔는 79년 시아누크의 주선으로 평양 근교에 있는 그의 저택을 이틀간 방문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시아누크는 노래를 짓거나 영화를 만들고 다른 망명객들과 소식을 교환하며 울분을 삭이려 애썼다. 아침7시에 일어나 두시간 동안 ‘미국의 소리’(VOA) 방송 뉴스를 들은 뒤 손님을 만나거나 외국 신문사 혹은 지지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방문기에 따르면 시아누크의 식탁에는 항상 생선·스테이크·캐비어와 두종류의 포도주(프랑스산과 북한산)가 올랐고 저녁에는 가족 및 측근들과 영화를 감상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모두 영화를 좋아한다. 그들은 최신 외국 영화를 수입하여 본 뒤 필름을 사아누크에게 보냈다. 사아누크 자신도 소년 시절부터 지독한 영화광이었다. 젊었을때부터 최근까지 사아누크가 제작한 영화도 20편이 넘는다. 왕위에 있을 때는 프놈펜 영화제를 개최하여 자기가 만든 작품에 대상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평양에 머무를 때 시아누크는 자기가 만든 영화를 김일성에게 구경시키기도 했다. 〈보코르의 장미〉라는 이 영화 줄거리는 한 매력적인 일본군 대령이 캄보디아 미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남녀 주인공은 시아누크와 그의 아내 모니크가 맡았다.

김일성 위해 노래 만들기도
 김일성에게 필름을 보낸 며칠 뒤 시아누크는 방으로 뛰어들어와 “그가 내 영화를 칭찬했어! 그는 자기의 노선과 다른 것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야”라는 측근들에게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시아누크는 최근에도〈바탐반의 꽃〉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줄거리는 지금 캄보디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엔잠정통치기구(UNTAC) 소속 프랑스 병사와 캄보디아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라고 한다. 시아누크의 색소폰 연주는 프로급이며, 피아노를 치면서 직접 노래를 짓기도 한다.

 시아누크가 평양에 머무르면서 김일성에게 바친 노래는 알려진 것만도 ‘김일성 원수께 드리는 송가’ ‘평양’ ‘장수원의 둥근 달’ 등 세곡이다.

 시아누크의 망명 생활은 75년 크메르 루주가 론 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프놈펜을 탈환하면서 일단 중단됐다. 김일성은 75년 4월19일에 시아누크의 프놈펜 진입을 경축하는 평양시 군중집회를 개최했고, 12월에는 군사훈련을 지도할 북한 정규군 50여 명을 파견했다. 또 76년 1월 시아누크가 국가원수로 옹립된 뒤에는 사회안전부 요원 20명을 파견하여 보안업무를 지원토록 했다. 그러나 시아누크는 곧 크메르 루주의 폴 포트 정권에 의해 가택 연금을 당했다. 론 놀 정부를 몰아내기 위해 손을 잡긴 했지만 애초부터 그는 토착 공산주의 세력인 크메르 루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 60년대에는 그들을 혹독하게 탄압하기도 했다.

 79년 1월 인도차이나 연방화를 꾀하는 베트남군에 의해 폴 포트 정권이 무너지자 시아누크는 다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이번에도 김일성은 그를 따뜻이 맞아주었다. 〈로동신문〉은 새로 수립된 헹 삼린 정권을 ‘베트남의 괴뢰정권’이라고 규정하고 소련까지 싸잡아 ‘지배주의 대국주의’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김일성은 시아누크가 주도하는 반베트남 민족연합전선을 결성토록 도와주었다. 81년 3월에는 크메르 루주 지도자 키우 삼판을 평양에 초청하여 시아누크와의 회담을 주선함으로써 반베트남 연합전선 구성의 첫 돌파구를 마련했다. 김일성은 82년 6월22일 콸라룸푸르에서 ‘민주 캄보디아 연립정부’가 정식 출범하기 직전에도 시아누크를 평양으로 불러 연정의 진로 문제를 협의했다. 그리고 91년 10월에 조인된 파리평화협정에 따라 금년 5월 치러진 선거에서 시아누크파는 승리를 거두었다. 시아누크의 방랑 생활도 막을 내렸다.

철저한 자주 노선에 의기 투합
 정치지도자로서 두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강대국 개입에 반대하는 철저한 자주 노선이다. 시아누크는 41년 집권 당시부터 일관되게 비동맹 중립외교를 펼쳐 왔다. 그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 강대국에 의해 각각 한번씩 (1970, 1979) 권력을 빼앗긴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김일성도 60년대부터 중·소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 외교를 천명해 왔다. 시아누크가 65년 처음 평양을 방문했을 때 거리에 나붙은 현수막에는 ‘반제투쟁에서 우리와 함께 굳게 연결되어 있는 전우의 나라 캄보쟈’라고 씌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모든 면에서 일치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시아누크는 사회주의를 지지하지 않았다. 시아누크는 크메르 루주에 협력하기를 원하는 중국과 북한의 요구를 불쾌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어딘가에서 “나는 북경을 떠나기 전에 등소평에게 ‘크메르 루주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자. 괜히 접시를 집어 던지며 싸움만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축구 이야기만 했다. 그는 차갑고 잔혹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또 “김일성은 나를 도와주는 척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중국과 폴 포트 정권 편이다. 그는 캄보디아의 공산화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국민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나의 계획이 반동적인 것이라고 싫어한다”라고 말했다.

 김일성이 이처럼 자기와 노선이 다른 시아누크를 지원한 데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인도차이나와 비동맹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를 원했다. 또 미국과 소련의 직접 피해자인 시아누크의 북한 방문은 상당한 선전 효과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아누크가 올 때마다 김일성은 성대한 군중집회를 열어 그를 환영했다.

 김일성은 정치적 이유로 시아누크를 홀대하지는 않았다. en 사람 사이에는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버나드 크리셔는 “이는 과거 도움 받았던 일을 잊지 말고 친구가 어려울 때 도와줘야 한다는 김일성의 확고한 유교적 윤리관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김일성은 시아누크가 눈칫밥을 얻어먹고 다니던 시절 그를 돌봐준 사람이다. 또 시아누크는 김일성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60년대에 비동맹권과의 연결고리 노릇을 해주었다. 이렇게 맺어진 두 사람의 30년 우정이 하루아침에 끝날 것 같지는 않다.
韓宗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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