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일’ 아닌 일본 정치 변혁
  • 박권상 (편집 고문) ()
  • 승인 1993.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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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립 정부를 구성한 정파는 외교 노선이 제각각이어서 이해 대립이 심해지면 자칫 한반도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일본 하면 금권 정치를 생각한다. 일본 하면 파벌 정치를 생각한다. 일본 하면 부패 정치를 생각한다. 경제 건설에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모범생인데 정치만은 돈과 파벌과 부패로 얼룩졌다.

 일본의 돈·파벌·부패 정치는 장장 38년간 자유민주당의 1당 지배를 가져왔다. 그러나 자민당은 반드시 주의·주장을 같이하는 단일 정당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해관계로 뭉친 네댓개의 파벌연합이고, 정권의 책임을 파벌 간에 돌려가며 맡았다. 파벌 정치는 한 지역에서 2~5명을 뽑는 일본 특유의 선거제도에 공생할 수 있었다. 한 선거구에서 파벌이 경합한다는 것은 정당 본위의 정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일본 정치에 쉴새없는 부패 추문과 독직 사건이 잇따르는 까닭도 실은 선거제도에 기인했고, 여기에 대한 반성의 소리가 거세게 일면서 선거제 개혁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미야자와 총리 정부는 오랜 숙제이자 국민의 여망인 정치 개혁을 단행할 힘이 없었다. 파벌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지도력 부족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결국 유력한 한 파벌이 지난 6월 야당연합과 손을 잡자, 정부 불신임안이 중의원에서 싱겁게 가결되었다. 결과적으로 지난달 총선거는 자민당의 계속 집권을 거부한 것이다.

내년 봄 또 한차례 파란 예고
 그것은 38년 간의 장기 집권에 염증이 난 것이고, 무엇인가 ‘변화와 개혁’ 없이는 정치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다는 유권자의 소리였다. 동시에 지난 7월18일 총선거는 또 한가지 중대한 시대의 흐름을 표출시켰다. 38년간 제1야당이었던 사회당이 자민당에 대한 대체 세력일 수 없다는 것, 사회주의가 공산주의 세계에서 모두 무너졌을 뿐 아니라 서구 민주주주의 나라에서도 사양 길을 걷고 있듯이, 더구나 경제대국 일본에서 어찌 발 붙일 수 있겠느냐라는 국민적인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즉 사회당의 의석도 절반으로 줄어 5백11석의 중의원에서 70석을 차지했을 뿐이다. 지난 3월 프랑스 총선거에서 집권 사회당이 국민의회 5백77석 가운데 70석 밖에 얻지 못한 것과 너무나도 흡사한 현상이다. 공교롭게도 프랑스 공산당이 24석밖에 얻지 못하였는데 일본 공산당도 15석밖에 못얻었다. 이제 프랑스나 일본에서는 좌파 세력이 모두 손을 잡아도 정치적으로 별볼일 없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이것은 좌파 대신 중도파가 우파를 대체할 세력으로 대두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프랑스에서는 우파의 공화국연합이 중도파의 민주연합과 연립하여 압도적 다수의 보수당 정권을 세웠지만, 일본의 경우 자민당에서 떨어져 나온 중도파 세력이 사회·공명·민사 등과 연합하여 새 정부를 세운 것이다.

 새 정부의 중심을 이루는 자민당 탈당파는 1년전 인본신당 36석을 비롯하여 지난 6월 탈당한 신생당 55석, 그리고 신당 사키가케 13석, 무소속을 합하여 1백30석에 이른다. 이들이 사회당(70석), 공명당(51석), 민사당(15석) 등 38년간 야당 간판을 지켜온 중도·중도좌파와 손잡아 자민당 일당체제를 무너뜨린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후하게 보아도 7개 정파로 구성된 비자민 연립정권이 항구성을 띤 안정 정권일 수는 없고 안정 정권을 지향할 수도 없다. 잠시 ‘정권교체’라는 새 바람속에서 손을 잡은 정략 결혼이고, 이미 국민적 합의를 이루고 있는 소선구제와 비례대표제를 병합한 선거제도가 금년 가을 채택되면 내년 봄에는 다시 한번 총선거가 실시될 것이며, 그 결과에 따라 일본의 정치 판도가 드러날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시점에서 1년 후 상황을 점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큰 흐름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6·25 북침설’ 믿는 정파 있어
 무엇보다도 지난 38년간 있었던 보수 대 혁신이라는 대결 구도는 사라지고 우파(자민당)와 중도파가 일본 정계의 두 축을 이룰 것이다. 자민당 탈당파 중심의 중도파가 설득력과 호소력과 응집력을 지닌 새로운 단일 정치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다면, 일본 정치는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고, 경제 수준에 걸맞는 원숙한 정치체제를 갖추어, 아시아에서는 서구 민주주의로 경제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식의 일부 개발독재론을 무색케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일본 새 정권의 대외 정책에 여러 가지 심려할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 기본적인 정책을 수정하지 않고 자민당 정부의 외교 노선을 답습하겠지만, 연립 정부를 구성하는 7개 정파들 간에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특히 사회당의 경우, 우리로서 심히 걱정스러운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견지해온 친평양 노선이다. 아직도 6·25는 미국과 남한의 ‘북침’에서 시작되었다는 식의 편협된 생각을 못 버리고 있다. 문제는 그렇듯 고루한 스탈린주의적 사고방식에 집착하고 있는 극좌 세력이 일본 정부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데 있다. 반면 자민당에서 나온 신생당은 헌법을 고쳐서라도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대국’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입장이고, 사회당은 ‘평화 헌법’을 고수하는 것이 기본 노선이다. 이렇듯 동상이몽 정권이기에 우리로서는 일말의 불안감을 누를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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