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선 참패·실명제에 이기택 대표 ‘失名’위기
  • 문정우 기자 (mjw21@sisapress.com)
  • 승인 1993.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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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지도력 빈곤’공격…DJ 그늘 빨리 벗어나야

태풍과 무더위, 불법 시비 속에서 치러진 대구·춘천 보궐선거가 막을 내렸다. 집권 여당인 민자당과 제1야당인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 큰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총력전을 펼쳤으나 두 당 모두 패배하는 쓰라림을 맛보았다. 특히 민주당은 두 곳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도 있었다는 점 때문에 선거 패배의 책임 소재를 놓고 당내에서 한바탕 충돌이 예상된다.

 결과론이지만 이번 보선은 민주당의 입장에서 보면 진한 아쉬움이 남을 것이 분명하다. 춘천 보선에서 민주당 유남선 후보는 민자당 유종수 후보와 막판까지 당락을 점칠 수 없는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이 한때 선거를 거부할 움직임을 보여 운동원들의 김을 뺐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구 보선에서는 공천 전 민주당 문을 두드렸던 무소속 서 훈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던 무소속 서 훈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기 때문에 민주당은 굴러들어왔던 복을 차버린 꼴이 됐다. 물론 서후보가 민주당 간판을 달고 출마해서도 당선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민주당은 꼴찌를 하는 수모만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대표 “비주류도 책임 있다”
 이번 보궐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민주당내에서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한다면 수세에 몰릴 사람은 당연히 선거를 총지휘한 이기택 대표가 될 것이다. 이대표도 그런 점을 의식해 선거가 끝난 8월13일 기자회견에서 “국민의 눈에는 당 지도체제의 모순, 인사시비, 주류와 비주류 간의 터무니없는 갈등이 좋지 않게 비쳤을 것이다”라며 비주류를 견제했다. 즉 이번 선거 패배에 대한 비주류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또 후보 공천 문제에 대해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중론을 모아 결정한 것이다”라며 절차가 민주적이었음을 애써 강조하려고 했다.

 이번 보선이 있기 전까지 이기택 대표는 사실 당내에서 입지를 확대 강화하며 비교적 평탄한 길을 달려왔다. 3월 전당대회 때는 2차투표까지 가는 곤욕을 치른 끝에 대표에 당선돼 출발이 불안했으나, 명주·양양 보궐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한숨을 돌렸다. 그뒤 김대중 전 대표가 영국에서 돌아와 이대표를 지지하는 종전 입장에 변화가 없음을 분명히하자 그의 목소리에는 부쩍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지난 7월8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는 “정치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적은 대권을 장악해 그동안 정치를 해오며 품은 생각·철학·포부를 마음껏 펼쳐 보이는 것이다. 어려운 정치를 계속하는 것은 험난한 대권고지까지 내 소신·포부·방식으로 가보자는 것이었고, 그래서 오늘까지 오게 됐다”며 대권에 도전할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실제로 이대표는 대통령후보가 되기 위한 정치 작업에 이미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씨와 민주당 공동대표를 맡고 있던 시절 언론에 “이대표의 동정을 좀 실어 달라”고 사정하던 초라한 개인 비서진용을 확대개편하는 작업을 현재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또 옛 민주당 시절부터 10여 년간 이대표를 따르는 인사들의 친목 모임인 통일산하회를 정치 결사 형태의 사조직으로 바꾸는 복안도 갖고 있다고 이대표 측근의 한 인사는 귀띔한다. 김대중 전 대표의 은퇴로 조직에 맥이 빠져 버린 연청에 손을 뻗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대선 당시 회원 수가 30만명에 육박하던 연청 조직은 현재 살은 이미 떨어져나가고 골격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연청의 한 관계자는 “지난 전당대회 때 김 전대표의 뜻에 따라 이대표를 지원하면서 연청과 이대표는 심정적으로 많이 가까워졌다”고 말한다. 현재 연청 중앙회 회장을 이대표의 비서실장인 문희상 의원이 맡고 있기 때문에 이대표로서는 연청과 손을 잡기에 유리하다.

 그러나 이대표의 야심에 찬 행보는 이번 보선에서 패배함으로 말미암아 제동이 걸리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상대적으로 위축돼 있던 비주류측에서는 이번 기회에 이대표가 그동안 당을 운영해오면서 보여준 파행을 있는 대로 까발려 본격적인 공세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DJ·이대표 관계 소원해져
 요즘 이대표를 연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는 이 철 의원 진영의 한 관계자는 “이대표의 지도력 부재로 이제 당은 갈 데까지 다 갔다. 하위 당직자들의 인선조차 깔끔하게 마무리 하지 못해 보궐선거 상황실을 백화점에 차려야 할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대표는 책임을 통감하고 물러나야 한다”라고 흥분한다.

 현재 민주당 재임용에서 탈락한 하위 당직자들이 “최고위원들이 철저히 당직을 지분에 따라 나눠먹는 바람에 당에 헌신하던 많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됐다”고 항의하며 당사를 점거하는 바람에 한달째 당사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다 일부 의원이 그들의 주장에 동조해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고 있는 상태여서 당이 극심한 분열상을 보이고 있다.

 이대표에게 지도력이 없다는 점은 그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조차도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그동안 이대표의 행보에 비교적 발을 잘 맞춰나갔던 민주정치개혁모임의 한 의원은 “이대표는 책임지기를 싫어한다. 상황이 좋을 때는 대표 노릇을 하려고 하고, 상황이 좋지 않으면 최고위원 아홉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라는 식으로 뒤로 쑥 빠져버린다”라고 비판한다.

 그는 이기택 대표가 결단성이 부족한 탓에 김대중 전 대표가 떠난 자리가 더욱 넓어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만약 이대표가 대통령후보가 돼 자기 뜻을 펼 정치적 야심이 있다면 더 신뢰받을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민주당 내에서는 ‘김대표가 있었으면…’하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김대표가 있었으면 아무리 김영삼 정부의 사정 바람이 거세도 야권이 이렇게까지 지리멸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가뜩이나 ‘김대중이란 큰 언덕에 얹혀 사는 존재일 뿐’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는 이대표로서는 이같은 당내 기류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보선이 있기 얼마 전 이대표는 “정부와 민자당이 투표율을 낮추기 위해 일방적으로 가장 더운 때를 골라 선거 날짜를 잡았다”며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선거에 불참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의원총회와 최고위원회의에서 신중을 기하자는 의견이 쏟아져나오자 그 주장을 철회하고 말았다.

당내 견제는 입지 강화 ‘신호탄’주장도
 민주당 관계자들은, 만약 김대중 전 대표가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절대로 일을 그렇게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 전대표라면 모든 최고위원들이 반대하더라도 끝까지 설득해 관철했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물론 김대중 전 대표의 당 운영 스타일에 민주당 관계자들이 너무 익숙해 있다는 것도 이대표에게는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대표가 명실공히 당의 얼굴로서 홀로 설수 있으려면 김 전대표의 그늘에서 하루 바삐 벗어나야 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대표는 지난 7월20일 전경련이 주최한 최고경영자 전략 세미나에서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에 출마한다고 마음을 바꾸고, 그것이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서슴없이 밀어드릴 용의가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대표가 김 전대표를 내심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지 잘 나타내주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은 김 전대표와의 관계가 이전과 같지 않게 소원해져 이대표가 더욱 불안해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물론 상황이 이대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최근 들어 이대표에 대한 비주류의 견제가 심해지고 있는 것은, 바꿔 말하면 이대표의 입지가 당내에서 점점 강화돼가고 있다는 얘기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주류로서도 구체적인 대안이 있어서 목청을 높이는 것 같지는 않다. 이대표가, 비록 반박자가 늦지만 정도를 잃지 않는 특유의 정치감각으로 이 고비를 무난히 넘길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많다.

 다분히 대구 보궐선거의 충격을 물타기하기 위해 택일한 것으로 보이는 김영삼 정부의 전격적인 금융실명제 실시 발표로 야권은 다시 허둥대는 모습이다. 안팎으로부터 동시에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는 이대표의 앞길이 무척 험난해 보인다.
文正宇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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